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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8집 <그림 4> 부산지역 의열투쟁 관련인사의 거주지 [출전] 부산경찰서, 「부산경찰서 폭탄 투하에 관한 건」(高警 제31192호), 1921 ; 「제적등 본」 ; 「지적원도」 [비고] 김인태와 왕치덕은 번지수까지 확인하지 못해 위치를 정확하게 비정하지 못했 으나 대체적으로 동일 지역 내에 위치했던 것은 확실하다. 부산지역 의열투쟁 관련 인사들은 <그림 4>처럼 전부 좌천동과 범일동 에서 태어나거나 거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좌천동과 범일동은 부산 진성의 안팎으로, 부산의 대표적인 조선인 마을이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조선인 행정 중심지인 동래, 개항장과 함께 새롭게 성장하는 조선인 마 을인 초량과는 달리 부산 중에서도 변방, 주변에 해당했다. 그렇기에 부 산항의 발전과 함께 초량의 경우 상업이 발전하면서 조선인 상인들이 모 여들었고 이들 중 자본가로 성장한 자들도 많았다. 이에 비해 부산진의 경우 경편철도 부설공사 및 부산진 매축 등에 필요한 노동자들이 농촌으 로부터 유입되고 있었다. 30) 따라서 당시 부산진 조선인 마을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기와집이 거의 없이 전부가 초가집인 가난한 조선인 마을이 었다. 이렇게 부산진의 조선인 마을은 임진왜란 때 허물어지고 일본에 30) 임지원, 「한말~일제시기 부산지역민의 기독교 수용과 사회참여」, ꡔ석당논총ꡕ 44, 2009 참조. 이 논문은 초량교회와 부산진교회를 가지고 분석한 글이기는 하지만 당 시 초량과 부산진 조선인들의 경제적 상황을 잘 드러내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