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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남지역의 의열투쟁과 지역성 131 확장되면서 조선인 마을은 유통과 공업지구의 조선인 노동자 거주지구 로 심화되었다. 특히 <그림 3>의 지도에서처럼 1917년 완공된 조선방직 주식회사는 부산진 조선인 마을을 노동자 거주지로 만들었고 이후 전개 되는 공업화 과정에서 부산진 조선인 마을은 식민도시 부산에서조차 변 방, 변두리로 배제되었다. 이제 지역을 둘러싼 주관적 조건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들의 인적 관 계 가운데 직접적인 혈연관계는 장건상과 최천택 정도만 보인다. 그러나 의로 맺어진 혈연, 즉 의형제 관계를 맺고 있는 부분이 주목된다. 원래 주례에서 태어난 오택은 신학문을 접하기 위해 당시 부산진에 설립된 사 립 육영학교(부산진보통학교)에 수학하면서 부산진의 여러 인사들과 친 분을 맺었고 이어서 대부분의 친구들이 진학한 부산공립상업학교를 통 해 더욱 친분 관계를 돈독히 했다. 특히 같은 또래였던 박재혁, 최천택은 모두 독자였기 때문에 유고시 서로의 부모님을 돌보아 드리자고 하는 결 의형제까지 맺을 정도로 우의가 돈독했다. 실제로 최천택은 해방 후까지 박재혁의 노모를 자신의 집에서 모시고 있을 정도였다. 29) 그 밖의 인사 들도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이미 언급한 부산진 조선인 마을에서 나고 자 라는 한편, 정공단의 육영재를 비롯하여 범일동의 사립 육영학교(부산진 보통학교)와 영주동의 부산공립상업학교를 다니면서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었다. 먼저 주소지가 명확하게 확인되는 「부산경찰서 폭탄 투하에 관 한 건」(高警 제31192호)에 기재된 관련 인사들의 본적지 및 거주지를 통 해 지연관계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를 정리하여 표시한 것이 다음의 <그 림 4>이다. 29) ꡔ민주중보ꡕ 1946년 3월 1일 「지하에서 해방을 반겨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