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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남지역의 의열투쟁과 지역성 129 래대로 읍치의 명맥을 어느 정도 유지해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두 지역에 대한 일본인들의 토지 침투는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조선인들은 점차 외곽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일부의 조선인 상공업자만이 명맥을 유 지하고 있었다. 26) 이렇게 밀려난 조선인들은 초량 인근의 영주동과 부산 진 조선인 마을은 물론이고 시외로까지 밀려났으며 이 때문에 부산진 조 선인 마을의 처지는 더욱더 열악해졌다. <표 4> 부산지역 일본인과 조선인 인구 비교(1920년 현재) 지역 부산항 초량 부산진 구분 일본인 조선인 일본인 조선인 일본인 조선인 인구수 17,224 1,119 3,903 12,613 1,013 6,032 [출전] 釜山府, ꡔ釜山府勢要覽ꡕ, 1921. [비고] 일본인시가 중심의 부산항은 옛 전관거류지였던 富平町, 大廳町, 福田町, 西町, 幸町, 南濱町, 辨天町, 琴平町, 本町과 북빈 매축 및 영선산 착평을 통해 만든 常 盤町, 左藤町, 池ノ町, 埋立新町, 大倉町, 中町, 岸本町, 高島町, 東高砂町, 西高 砂町, 榮町, 相生町, 藏前町을 포함한다, 조선인시가 중심인 초량은 瀛州町, 草梁 町, 水晶町을 포함한다, 부산진은 左川町, 凡一町을 포함한다(森田福太郞, 「附 錄, 釜山町名一覽」, ꡔ釜山要覽ꡕ, 부산상업회의소, 1912). 위 <표 4>와 다음 <그림 3>을 통해 보면, 부산항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 인시가가 북빈 매축, 영선산 착평, 부산진 매축 등을 통해 동북쪽으로 점 차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민족별 인구와 관련하여 전통적인 조선인 마을인 부산진 쪽의 인구가 개항과 더불어 경제적 발달에 따라 초량 쪽으로 이동했음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일본인들의 진출에 따른 도시화가 진전되는 두 지역에 낀 부산진 조선인 마을은 상대적으로 지역 적 발전이 더디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에 의해 변화의 바람이 불었을 때 에도 도리어 침탈의 현장이 되었다. 26) 최원규, 「19세기후반·20세기초 경남지역 일본인 지주의 형성과정과 투자사례」, 112~120쪽 ; 임지원, 「한말~일제시기 부산지역민의 기독교 수용과 사회참여」, ꡔ석당 논총ꡕ 44,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