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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8집 중단하고 조선의 명승고적을 돌아본다는 핑계로 각지의 독립운동세력들 을 살펴보고 관계를 맺던 무전여행 때 부산에서 만났던 가장 인상 깊었 던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23) 이를 인연으로 이후 국내에서도 자주 연락 한 것으로 보이며 1917년경 상해에서도 다시 만나 의열단에 관계했고 줄 곧 김원봉과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왕치덕의 경우도 해방 후 김원 봉의 부산 방문 때에 자신의 범일동 집에 초대하는 등의 일화와 김원봉, 오택, 김인태와 함께 찍은 사진, 그리고 의열투쟁 관련 유족들의 증언을 고려해 볼 때 직·간접적으로 의열단과 의열투쟁에 관여했을 것으로 보 인다. 24) 더군다나 김원봉과의 만남 이후 김인태도 독립운동을 위한 목적 하에 계획한 무전여행 때 왕치덕과 오택이 송별을 위해 함께 동행했다. 이들은 도중에 간도와 중국에 대한 의견을 구하고자 김원봉을 만나러 밀 양에 갔지만 김원봉이 출타 중인 관계로 만나지 못하고, 결국 밀양강을 배경으로 사진만 찍고 돌아온 일도 있는 것으로 보아 1914년을 전후하여 김원봉과 이미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25) 따라서 이러한 유대 가 부산경찰서 투탄의거로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부산진 지역의 객관적 상황을 살펴보고 이어서 긴밀한 인적 관계를 형성하게 된 주관적 조건을 살펴보도록 하자. 부산진은 부산진성을 둘러싼 전통적인 조선인 마을이었다. 물론 임진 왜란을 거치면서 국방상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지만 조선 후기가 되 면서 그 중요성은 점차 줄어들었다. 개항과 더불어 새로운 변화의 기운 이 불어왔지만 변화의 바람은 전통적인 조선인 마을을 비껴갔고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지역의 성장을 가져왔다. 따라서 부산진 조선인 마을은 부산 지역의 여느 조선인 마을보다 열악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웃 의 초량 조선인 마을의 경우 개항과 더불어 개항장 객주들이 자리 잡았 고 일부는 부산항의 발전과 더불어 신흥 세력으로 성장해갔고 동래는 동 23) 박태원, ꡔ약산과 의열단ꡕ, 깊은샘, 2000, 18쪽. 24) 김삼근, ꡔ부산출신독립투사집ꡕ, 태화인쇄사, 1982, 71·139~140·164~165쪽. 25) 김삼근, ꡔ부산출신독립투사집ꡕ, 88·16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