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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으킨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 준비단계에서부터 깊이 관여한 매동석 에 의해 긴밀하게 연결되어 준비되었다는 점을 확인 할 수 었다 매동석이 이령리를 다녀간 뒤 김세민 장로는 3월 2일 13인의 이령 려 주민을 대동하고 광무황재의 국장을 매관하기 위해 상정하였다 이들은 서울에서 광무황재의 국장 뿐 아니라, 서울시내에서 벌어지고 었었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직접 목격하였다 김청오는 일행과 함께 귀향하지 않고 3월 8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38) 나 이령러 시위운동의 전재 3월 5일 이령리로 돌아온 김세민 풍은 이튿날인 3월 6일 29명의 동리 인사들을 모아 이령려 교회에서 만세시위 준비모임을 갖고 3일 뒤인 3월 9일 연재장날에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청하였으며, 그 대 잭위원으로 여봉준, 꽉성복, 김주현과 3월 8일 서윷에서 내려오는 김 청오를 션임하여 준비를 맡겼다 이 준비모임에 39명이 초L석한 것으 로 전한다 :Ð) 3월 9일 이령리 만세시위운동은 아직 문헌켜 근거를 핫을 수 없으 나; 1976년에 주민들이 세운 3.1운동기념비에 새겨전 내용을 통해서 보면 다음과 갇다 3월 9일 청오 연재장터에 많은 군중이 모였다 대 회장인 김세민이 재회사를 하고 이어 유관도가 격려 연설을 한 후, 김청오가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후 정명 학교 학생들을 선두로 손에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석양이 칠 때까지 동리를 행진 했다 당시 동L석한 사람들은 앞의 준비모임에 초L석한 39명과 함께 36 38) 옳lEl훌 심푼초서(국시편찬위원회 편, 위 책.22τ222쪽) 39) 김두향, 김수캄, 이얀용, 여경천, 확친수, 손학용, 감금석, 렴정황, 엄태정, 김만 욕, 김윤석, 김성추, 황출이, 배양천, 박기우, 구제남, 이명。1. 황미리아, 이뀌얘, 김혜렴, 이션욕, 김혀|숙, 김장덕, 확성욕, 임순우, 엄또일, 율용수, 진익이, 김순 (기념비 빛 이규석, 위 왜.3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