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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의 휘는 환이요 자는 성삼이며 호는 삼봉이다. 서기 1900년 12월 30일 부여군 양화면 초왕리에서 태어나시었다. 시조는 고려 태조조에 공엄(양천 고호)의 허선문 촌주이시며 엄친은 조선 성종조의 양천부원군 우의정 충정공 허종의 16세손인 효자 허용씨의 장남으로 향리에서 덕망이 높던 허홍 선생이요 자당은 밀양박씨이다. 열사는 임천 보통학교와 강경 양정학원에서 수학한 후 시국이 날로 그릇되어감을 보고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서는 힘을 길러 스스로 강해지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동향의 동지 송수하 박경래 김태권 등과 금계청년회를 조직하여 주도하시고 야학당을 개설하여 동민의 문맹을 퇴치함과 동시에 생활개선과 구국정신을 함양하시었다. 다음해인 기미년에 고종황제께서 승하하시자 열사는 회원과 함계 백색대에 백지건을 쓰고 버드나무 지팡이를 짚고 북쪽 서울을 하해 통곡하며 비통함을 참을 길 없어 입포 임천시장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나아가 열변을 토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불러 군중을 격앙케 하시었다. 그로부터 일제의 강압은 더욱 심해저 열사는 1923년 만주를 거처 상해 임시정부로 가는 도중 체포되어 조사를 받은 후 귀국하시었다. 그 후 열사는 관헌의 감시를 피하려 부득이 일본에 들어가 천리교인을 위명하고 재일 조선인 학생과 뜻있는 동포와 같이 독립의 지하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여의치 않으므로 비밀리에 개성에 있던 고려 인삼국의 인삼상 허가증을 얻어 1931년 9월 마침내 대만으로 건너가 동지들과 조선인 친우회라는 애국단체를 결성하고 자금을 거두어 조국광복에 이바지하던 중 1934년 6월 일본 관헌에 검거되어 모진 고문 끝에 사경에 이르러 동년 10월 4일 그곳 대만 총독부 대중병원에서 애통하게도 운명하시었다. 동월 9일 왜경은 살인의 증거를 인멸하려는 얕은 수법으로 유해가 송환되어 양화의 선영에 묻치니 그때 열사의 연치는 35세였다. 중일전쟁이 이러나자 장남 ○은 왜경에게 끌려가 끝내 도라오지 않았다. 비록 열사는 생시에 큰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그가 순국한지 11년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