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page


50page

가 되어주기를 바랐기 때문에 열사는 서울로 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왜경은 행인들에게 전염병 예방주사를 실시하고 있었다. 열사는 이를 수치로 여기고 고향으로 돌아와 버린 후 1920년(경신) 8월 그 전염병으로 녹문 본가에서 서거하니 향년 61세였다. 원근의 사우들은 제문과 만사를 지어 열사의 일생을 추모하면서 「우리 고을에는 이제 사람이 없게 되었다. 누구와 의리를 논하며 국가의 회복을 바라겠는가」라고 하면서 애도하였다. 이것은 열사가 사람을 움직일만한 권세나 위치를 가져서 그런 것이 아니고 국가에 대한 충성과 의리가 자연히 사람들을 감동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었겠는가. 초야에서 일어나 수많은 고초를 당하면서도 꺽이지 않은 그 불굴의 항일의지와 투쟁은 귀신에게 물려도 부끄럽지 않고 천하후세에 말해도 당당할 수 있으리라. 1977년 정부에서는 건국포장을 추서하여속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올려 추서하였다. 1980년에 묘전에 세운 비문이 소략하여 이시우 보령시장님과 김철형 시의원님 그리고 보령문화연구회의 주선으로 손 긍수 종수가 묘역을 정비하고 열사의 항일위적(항일위적)을 드러내고자 함에 비록 단문이지만 삼가 대망을 추리어 이와 같이 적는 바이다. 서기 2004년 4월 일 장수후인 황의천 지음 보령시장 이시우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