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page


49page

일 유림들 사이에서 얼마나 명망이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것일 것이다. 얼마 후 왜병의 야습으로 성문이 파괴되면서 홍주성이 무너지자 의병장 이하 모두 피신하기 급급했지만 오직 열사는 피신하지 않고 의병관련 기록을 소각한 후 당당하게 체포되었다. 의병진에 가담한 유림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체포된 의병들에게 가혹한 심문이 행해질 때 열사가 나서서 가담자는 나와 몇 사람뿐이니 우리를 처벌하고 모두 돌려보내라 호통을 쳐서 많은 사람들이 석방될 수 있었다. 그 후 열사는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다른 8명의 의사와 함께 일본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낯선 이국 땅에서 4년 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는가마는 그들이 주는 옷은 끝내 입지 않았고 모두 강제 노동을 당했지만 열사는 마당에 내려가 풀 한 포기도 뽑지 않았다. 이 때 면암 최익현도 이곳에 유배되어 열사는 소학을 가지고 배움을 청하고 제자의 예를 갖추었으며 면암의 병이 깊어지자 자식처럼 주야로 간호하였다. 1909년 고국에 돌아온 후 늦게 아들을 낳았으나 일제의 호적에 올리지 않아 보령경찰서에 구금되어 온갖 협박을 당했지만 끝내 입적을 허락하지 않았다. 열사는 보령 집성당과 청주 만동묘에서의 활동을 통하여 윤석봉 김복한 김상덕 유호근 조구원 백관형 최영조 조재학 등 지역 및 전국의 항일 유림들과 도의지계(道義之契)를 맺고 의리를 논하면서 항일의지를 다져 나갔다. 1912년 고종황제의 밀명으로 임병찬에 의해 대한독립의군부가 조직되엇을 때 충청도 대표자로 활동하였다. 1919년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여한 후 순종황제의 복위와 독립국 선포를 청원하는 상소문을 소두가 되어 추진하여 조선독립을 도모하였으며 이어서 열사와 문일평 등 조선민족대표 12인은 독립이 이루어질 때까지 투쟁한다는 12인 등의 장서를 연명하여 총독부에 전달하는 한편 종로 보신각에서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낭독하는 활동으로 만세 시위 확산을 도모하였다. 또 1919년 서울에서 심산 김창숙 등과 함께 우리나라의 독립을 국제 정의에 호소하는 파리장서운동 추진을 협의하고 전국의 유림들을 참여시키기 위해 각 지역에 책임자들이 나섰는데 열사는 전라도 지역을 담당하였다. 이 때 낙학파의 거두 간재 전우가 동참을 거절하니 열사는 이에 맞서 당당히 그와 독립운동의 당위성과 방법론에 대하여 논쟁을 하였다. 이 파리장서에는 전국 유림 137인이 서명하였고 열사도 유림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일련의 사건들로 체포되어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는데 당시 수감된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깎였지만 열사만은 저들도 어찌하지 못하였다. 1920년 일제의 유교 어용화 정책 반대와 유교 윤리 진작을 통한 항일운동을 위하여 경향의 유림들이 인도공의소를 설립하였고 경향과 지역의 유림들은 열사가 보령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