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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의 휘는 준근이요 자는 순경이며 전주류씨이다. 호는 우록인데 대마도 유배시 면암 최익현이 지어 준 것이다. 고려말 완산백 휘 습이 시조이고 연산조에 대사간을 역임하고 청백리에 오른 휘 헌(호 낙봉)이 13대조이며 6대조인 휘 춘영이 보령에 입향하고 증조 휘 발은 문장과 효행으로 유명하고 조고는 휘 난철이고 고는 성균생원 휘 형인데 부인 광산김씨를 맞아 1860년(경신) 보령 녹문에서 열사를 낳으니 기위담대(器偉膽大)하며 성품이 호탕하고 얽매임이 없었다. 일찍 부친을 여의고 가세가 기울어 학문할 기회를 잃은 것이 생전의 한이 되었지만 사문의 중망을 얻고 있던 재종형 호근과 원근의 선비들을 따라 바른말을 듣고 의리를 따르기를 좋아하였으며 악한 것을 싫어하되 원수처럼 하였다. 늦게 주경야독하여 우암 송시열의 의리론을 숭모하여 더욱 의리와 지조가 굳어 족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만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면암 최익현이 노성 궐리 사강회에서 전국에 납세 거부 투쟁을 역설함에 열사는 보령 유림들과 연명하여 통문을 돌리고 납세 거부 투쟁을 전개하던 중 관리가 세금을 징수하러 왔을 때 누구를 위하여 세금을 징수하는가 라고 힐책하면서 관리를 묶고 매질을 하였다. 이로 인해 투옥되었지만 군수도 어찌하지 못하고 석방하고 말았다. 을사조약으로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통분을 참지 못하고 거의토적(擧義討賊)하고자 하는데 두려워 따르지 않는 사람도 있었지만 열사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대부들은 경복하면서 거의에 동의하였다. 그러던 중 1906년(병오) 민종식이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으로 진격하는 도중 남포읍성에 머물면서 열사를 불렀다. 병중이었지만 기꺼이 가담하여 홍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유병장의 직책을 맡게 되었다. 당시 다른 의병진에서는 볼 수 없는 유병장의 소임은 열사가 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