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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터가 있는 상유정 마을에서는 아는 사람이 없었고 하유정 마을로 가보라고 해서 왔지만 찾을 수 없다. 김용철이라는 이름은 공훈록에서는 찾을 수 없지만 자세한 내용을 알고자 왔는데 매우 아쉽다. 다음의 사진과 내용의 출처는 김녕김씨 충의공파 홈페이지(http://kyoungch.com/)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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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의 휘(諱)는 용철(溶哲)이니 충의공(忠毅公) 휘(諱) 문기(文起)의 十三세손이신 휘(諱) 명성(明聲)공의 아드님으로, 一八八七년 三월 七일 충남 홍성군 홍북면 신경리(忠南洪城郡洪北面新耕里) 五十七번지 자택(自宅)에서 출생(出生)하시었다. 공(公)은 일찍이 기울어져가는 국운(國運)을 비탄(悲嘆)하면서 분연이 구국운동(救國運動)에 앞장섰다. 일제(日帝)의 식민지탄압(植民地彈壓)으로부터 자주독립(自主獨立)을 쟁취(爭取)하기 위하여 맨손으로 항거(抗拒)하다 체포(逮捕)되어 고문(拷問)을 당(當)한 끝에 풀려났으나 육신(肉身)의 고통(苦痛)을 간직한 채 소리없이 살아오다. 숨겨진 독립투사(獨立鬪士) 五十八주년(周年) 삼일절(三一節)을 맞아, 같은 독립투사(獨立鬪士)인 김현경(八十一, 홍성읍 오관리) 여사(女史)에 의(依)해 뒤늦게 밝혀졌다. 공(公)은 홍성군 홍성읍(洪成郡洪成邑)에서 거주(居住)하시면서 외세(外勢)에 짓밟히는 나라를 구(救)해 보겠다고 一九○七년 二十一세때 의병(義兵)으로 참가(參加)하시어 애국심(愛國心)과 독립정신(獨立精神)으로 맞선 용철(溶哲)공은 독립운동(獨立運動)에 몸담아 오다 三十二세되던 해 민족(民族)의 분노(憤怒)가 만천하(滿天下)에 메아리치던 기미(己未)년 三월 一일 대한민국독립만세(大韓民國獨立萬歲)가 온 천지(天地)를 뒤흔들 때 홍성용봉산(洪成龍峯山)에서 봉화(烽火)를 점화(点火), 봉화(烽火)를 휘두르며 홍성 조양문(洪成 朝陽門) (사적(史蹟)二三一호(號))까지 질주(疾走)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외치다가 왜(倭)놈의 관헌(官憲)에 붙잡혀 보름동안 갖은 고문(拷問)과 학대(虐待)를 받으며 투옥(投獄)됐던 독립투사(獨立鬪士)이다. 갖은 고문(拷問) 끝에 헌병대(憲兵隊)에서 풀려나온 공(公)은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을 부락민(部落民)들의 부축으로 귀가(歸家)하였으나 관헌감시(官憲監視)가 심(甚)한 가운데서도 누워만 있을 수 없다며 야음(夜陰)을 이용(利用), 상경(上京) 서울에서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해왔던 것이다. 한편 용철(溶哲)공의 아들 세권씨(世權氏, 六十八)등 일가(一家)를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의 자식(子息)이라 하여 학교(學校)에도 다니지 못하게 하는 등 박해(迫害)가 심(甚)해 공(公)의 큰 아들은 북간도(北間島)로 이민(移民)을 떠났던 것이다. 이같이 투철(透徹)한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인 용철(溶哲)공은 독특(獨特)한 개성(個性)의 소유자(所有者)로 자식(子息)들에게 「내가 할 바를 다 못했다. 이러한 일을 일절(一切)말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숨겨왔으나 해방후(解放後)인 四七년 三·一절에 홍성군 삼일운동기념대회(洪成郡三一運動記念大會)에서 군민일동(郡民一同)의 이름으로 감사장(感謝狀)을 받은 것마저도 알려지지 않던 것이 五十八년이 지난 一九七七년 三월 一일 비로소 알려졌다. 一九六九년 三월 三十一일 공(公)은 유명(幽明)을 달리하셨다. 사실(事實)이 七七년 三월 一일 화요일(火曜日) 충남일보(忠南日報)에 게재(掲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