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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교육의 진인이 계셨으니 여기 누우신 길영희 선생 바로 그분이시다. 갑자년(1984년) 3월 1일 향년 85세로 문득 유명을 달리하시니 어찌 뜻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으리오. 선생은 대한제국의 풍운이 몽몽한 경자년(1900년) 10월 9일 평안북도 희천에서 부 헌태 대인과 모 양찬린 여사의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자질이 영매하시어 평양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했으나 때마침 구국의 횃불 3‧1운동이 발발하자 몸소 앞장섰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옥고를 치르셨다. 그 후 선생은 민족운동속에서의 자신의 진로를 심각하게 숙고한 끝에 드디어 교육구국의 서원을 세우시고 문득 몸을 파도에 붙여 일본 광도고등사범학교에 유학하셨다. 1929년 귀국하자 배재고보와 경신고보에서 10년간 교편을 잡으셨으나 1939년 일제의 압박으로 교단마저 물러나게 되자 농과대학 설립의 꿈을 안고 동지들과 더불어 인천에서 후생농장을 경영하시면서 해방의 날을 기다리셨다. 광복 후 인천 유지들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여 인천중학교의 교장 직에 부임하니 그때 선생의 춘추 46세였다. 드디어 민족교육의 오랜 경륜을 펼치실 때가 도래하였음이니 1954년 제물포고등학교를 창립하여 교장을 겸임하면서 62세로 정년퇴임할 때까지 16년간 혈성을 바쳐 인중제고를 민족교육의 진정한 도량으로 만드셨다. 퇴직한 후에는 안온히 여생을 마치거늘 선생은 그렇지 아니하여 1969년 이곳 덕산에 농장을 마련하고 가루실농민학원을 열어 이미 젊은 시절부터의 오랜 꿈이던 농민교육에 헌신하셨다. 아! 선생은 일대의 사표. 때로는 사자후로 때로는 땀흘리는 노동으로 몸소 보여주신 가르침은 제자들의 마음 속에 빛과 소금으로 결정했음에랴. 불의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일생을 진정한 스승의 길에 사셨던 선생은 항상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셨으니 3.1절 날 눈을 감으심이 또한 어찌 우연이리오. 선생이시어 통일의 그날 함께 깨어나소서. 최원식 찬, 원중식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