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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광복, 다시 찾은 빛_굳은 의지와 진실한 마음으로 만든 미래 84 | 병영의거 1919년 4월 4 ~ 5일, 병영청년회 주도 당시 서울에서 유학하던 청년회원 한명조(韓命祚)와 이영호(李永浩)가 3월 1일 귀향해 회원 들에게 고종황제 독살설과 만세운동의 전말을 병영청년회 회원들에게 전했다. 병영청년회 간부들은 3월 3일 박영하(朴永夏)의 집에서 궐기를 결의하고 거사를 준비하였다. 4월 3일 카본 복사지로 200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복사하고, 태극기 500여 매를 만들었다. 4월 4일 9시, 청년회 회원들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품에 품고 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 교정 에 모여들었다. 일신학교 학생들을 합류하게 한 후 오후 11시 40분 축구공을 높이 차 올리는 신호로 양석룡(楊錫龍)이 ‘대한독립만세’ 라고 쓴 깃발을 높이 쳐들자 일제히 ‘대한독립만세’ 를 외쳤다. 그리고 삽시간에 수백 명이 이에 동참하였다. 울산경찰은 병력을 출동시켜 무력 진압에 나섰으며, 이에 격분한 시위군중과 사이에서 육박전이 벌어졌고, 총검을 앞세운 일본 경찰의 폭압에 일단 해산하였다. 이날 기수 양석룡을 비롯한 14 명이 붙잡혀 울산 본서로 호송되었다. 4월 5일 10시, 다시 일신학교 부근에 모여 ‘대한독립만세’ 라고 쓴 깃발을 이문조(李文祚)가 들고 만세를 부르며 시가지를 따라 주재소로 행진했다. 당일 전일의 거사가 널리 알려져 군중 들은 아침부터 일신학교 부근으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또 집집마다 지붕·담장 위에서 만세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시위 군중은 수천 명에 달했다. 일본 경찰에 의해 주동자가 체포되자 시위 군중들은 경찰주재소에 돌을 던지는 등 강력히 저항했으며, 일본경찰은 무차별 발포했다. 이때, 엄준(嚴俊)·문성초(文星超)·주사문(周士文)·김응룡(金應龍) 등 4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송근찬(宋根讚)·김규식(金圭植)·김두갑(金斗甲)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 후 이 운동에 활약한 인사들 40명이 검거되었고, 재판 결과 6개월~5년의 징역형을 받아 부산·대구형부소에 투옥되었다. 이러한 순국의사들의 충혼을 기려, 병영 삼일사 봉제회에서 중구 병영의 삼일사(三一祠)에 위패를 모셔두고 해마다 양력 4월 6일에 제를 올리고 있다. 3·1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여 경남에서도 3월 3일 부산·마산에 독립선언서가 배부되고, 3월 11일에는 부산진에서, 13일에는 동래·밀양·양산에서, 14, 15일에는 의령·통영 에서 전개되었다. 대도시에서 중소도시로 번져갔고, 4월에 들어서는 지방 농촌 곳곳으로 확산 되었다. 울산의 3·1운동에 대해 일본군 조선헌병대 사령부에서 작성해 1919년 6월 경무부장 회의석 상에서 보고한 문건인 「1919년 조선소요사선상황(朝鮮騷擾事件現況)」 에 따르면, “4월 2일, 언양면 면내에서 약 7백의 군중이 투석 기타 난폭하여 발포해 진정시켰다. 그리고 같은 달 4, 5일 양일 하상면 하상(병영)에서 청년을 중심으로 하는 소요가 있었는데, 5일은 압송한 피고의 석방을 강요하고 탈환을 목적으로 난폭해져 발포하여 진정시켰다. 4월 8일 온양면 남창에서도 시위가 있어서 총 4회, 3개소에서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언양 의거 1919년 4월 2일, 천도교 울산교구 주도 천도교 울산교구 김교경(金敎慶) 교구장이 고종황제 인산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천도교 총본부에서 독립선언서를 필사해서, 이를 편지에 담아 교구에 전달하면서 거사를 지시했다. 상경해서 구체적인 지시를 받은 이규장(李圭章)은 이후 최해규(崔海圭)·곽해진(郭海鎭)· 유철순(兪哲淳)·이무종(李武鐘)·이규인(李圭寅)·이규로(李圭璐)·이성영(李成榮)·강경찬 (姜庚贊)·최해선(崔海璇, 이명 允鳳)·이규경(李圭庚) 등과 함께 거사를 계획하였다. 3월 29일 밤, 당시 상남면사무소에서 등사기를 가져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고, 태극기는 한지에 그려 대나무로 손잡이를 만들었다. 4월 2일 11시경, 언양 장터에 모인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고, 태극기는 망태기에 넣어 짚으로 덮어 숨겼다. 그리고 언양 시장 복판인 남부리 도로상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외쳤고, 이에 많은 사람들이 호응해 동참했다. 일본 주재소(언양파출소)와 울산본서(경찰서) 순사들이 주동자를 연행하였다. 이에 격분한 군중들이 주재소에 몰려가 돌을 던졌다. 경찰의 발포로 길천댁(김씨)과 정달조·김종환 등 17 명이 부상을 입고, 허황·신동목·박채우 등 26명이 검거되었다. 이후 재판을 받아 형고를 치른 사람은 33명에 달한다. 울산의 3·1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