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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 글들을 교정 · 편집하는 과정을 죽을 때까지 멈추 지 않았다. 특히 29권의 초고들은 첫째는 특정 논제에 따라 내용을 분류하고 체계화한 점, 두 번째는 오언체(五言體)의 한문체를 고수한 점 등에서 전통적인 문집과는 구별되는 특 징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징들을 통해 그가 자신의 지 적 구도 전반에 대해 새로운 형식을 모색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31) 뿐만 아니라 그가 천착했던 논제들 역시 ‘기학(機 學)’, ‘감정[情]’과 ‘욕망[欲]’, ‘지식[知]’과 ‘용기[勇]’, ‘부[富]’ 와 ‘성공[功]’, ‘국가’와 ‘민족’ 등으로 전통적인 유학자들의 관심과는 매우 달랐다. 특히 ‘기학’은 김광진이 민족운동의 과정 속에서 갖게 된 ‘앎 과 실천에 대한 문제의식’을 체계화한 것이다. ‘기학’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면,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기미 · 조짐 · 낌 새[機]에 대한 학문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앞으로 일어날 사 건’이란 미래의 조선 민족의 독립을 의미하며, 따라서 ‘기학’ 은 그 독립의 기미를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는 방법을 제시 하는 학문이 되는 것이다. 앞서 뚜웨이밍은 김광진의 사상 을 “비장한 민족 자결주의를 제공하는 심리를 건설하는 방 법”이라고 평가 한 바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 김광진의 ‘기 학’은 민족운동의 심리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을 너머서 구 체적인 실천론까지 아우르고 있는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사건의 기미는 사건이 싹트기 전에 즉, 무엇이 있을지 드러 나기 전에 이미 시작되며 그것을 미리 알아차려야 큰일을 도 모할 수 있다. 이것을 ‘기미를 아는 방법[知機法]’이라고 하 는데, 김광진은 이 기미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두 가지가 필 요하다고 주장했다. 하나는 마음 상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지식이다. 마음 상태는 지극히 고요하고 욕망을 없앤 상태 가 되어야만 생각이 밝아진다. 32) 그리고 지식이란 실질적이 고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지식과 역사, 병법(兵法)을 의미하며, 이것을 익혀야만 세상의 흐름을 읽어낼 힘이 생 긴다. 김광진은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사람으로 제갈공명 (諸葛孔明)을 제시하며, 제갈공명이야말로 눈이 가장 정밀 하여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누구보다도 그 기미를 먼저 알 고 움직였다고 극찬했다. 33) 제갈공명처럼 지극히 고요한 마음과 뛰어난 학문을 겸비하 게 되면, 세상을 깊게 관찰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머 물러야할지[守] 나아가야할지[進], 변칙적인 방법으로 기습 해야 할지[奇], 속임수를 쓰지 않고 정정당당히 정공을 펼쳐 야 할지[正], 몸을 낮추고 굽혀야할지[屈] 몸을 드러내야할 지[伸], 자신을 표현해야할지[浮], 자신을 감추어야할지[沈] 를 알게 된다. 이렇게 역사와 세계의 흐름을 읽고 나면, 그 다음으로 기미를 놓치지 않도록 하는 빠른 결단력과 실행력 이 요구된다. 34) 이러한 개념들은 모두 ‘음양대대(陰陽待對)’ 관계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며, 병법에서 나오는 개 념들을 이용하여 설명한 것도 독특한 부분이다. 또한 김광진은 미래의 사건이 일어날 기미를 예측하기 위해 서는 유학자보다는 훌륭한 상인과 지혜로운 장수가 더 낫다 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유학자는 옛 것을 잘 알지만 진취적 인 뜻이 없고 명예를 구하는 마음을 천하게 여기기 때문에 다가오는 일을 추측하지 못한다. 이에 비해 상인이나 장수 í��해악문집��에는 1919년 가을 김광진이 언양 궁근정리에 피 신했을 당시 지은 한시가 한 편 실려 있다. 이것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24) 높은 산 계곡물 흐르는 곳에 山岳崢嶸澗水流 주인이 농사를 지켜보는 바위 누대가 있네. 主人觀稼有岩臺 서풍이 불어와 벼 심은 논에 새 가을이 영글어가니 西風禾畝新秋熟 남쪽 나라 무릉도원이 이 마을에 펼쳐졌구나. 南國桃園此洞開 먼 절에서 구름 속 풍경소리 아득히 들리고 隔寺遙聞雲裡磬 주막을 지날 때 달밤에 술잔을 기울이는구나. 過壚時把月邊盃 위의 시는 여유롭고 아름다운 궁근정리의 가을 풍경을 읊고 있지만, 김광진은 이곳에 3개월가량 머문 후 독립운동에 참 여하고자 다시 중국 만주로 떠나게 되었다. 그는 봉천에서 약 9개월 정도 머물렀으며, 병이 나서 그해 가을 안동(현재 중국 단동시)에서 요양을 했다. 1921년 정월에 고향인 비안 으로 귀국한 25) 김광진은 대구의 독립운동가인 윤상태(尹相 泰) 26) 가 설립한 사립 월배月背학교에서 3년 동안 교장을 지 냈다. 귀국 직후의 심정을 표현한 시조들이 전하는데, 독립 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좌절감과 회한이 담겨있다. 27) 이후 김광진은 1924년 의생(醫生) 시험에 합격하여 대구 산 격동(山格洞)에 한의원을 개업하였다. 1927년 9월에는 신 간회 대구지부가 결성되자 여기에 참여했고, 1930년 12월 14일에는 신간회 대구지부의 지부장으로 피선되었다. 28)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소된 이후에는 한의원을 운영하는 가운데 저술에 몰두하게 된다. 3. ‘기학(機學)’, 민족운동의 사상적 배경 김광진이 민족운동과 한의학 연구에 함께 매진했던 것은 얼 핏 보면 모순적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광진 에게 한의학은 민족을 구제(救濟)하는 또 다른 수단이었다. 김광진이 일생동안 가장 동경했던 인물은 범중엄(范仲淹, 989-1052)이었다. 29) 범중엄은 송나라 때 명재상으로, 미천 했던 시절 나중에 자신이 재상이 되지 못하면 의사가 되어 사람들을 돕겠다고 총령사(叢靈祠)에서 다짐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김광진은 몸이 약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할 수 없었던 것을 매우 한스러웠으나, 대신 한의사가 되어 대중 을 돕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는 1932년 자신이 “병과 약의 원리에 대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고백한 이후 4년간의 연 구를 걸쳐 1936년 자신의 한의학 이론을 집성하여 ��의학승 강법(醫學升降法)��을 완성했다. 30) 1930년대 김광진은 한의학 연구와 저술에 힘을 쏟는 동시 에 자신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저술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 는 기존에 글들을 분류하여 각각의 공책에 정서(正書)하고, 179 광복, 다시 찾은 빛_굳은 의지와 진실한 마음으로 만든 미래 178 | 24) ��海岳文集��, 卷18 「詩」의 <謹和彦陽弓根亭鄭檜朝君先丈觀稼臺韻>(393면) 25) 金永韶, <年譜>, ��海岳文集��, 549면. 26) 尹相泰(1882-1942) : 1911년 慶南 高靈에서 日新學校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에 힘썼다. 1915년 1월 15일(음)에는 경북 달성군 壽城面 安逸庵 에서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 를 조직하고 統領에 선임되었다. 1919년에는 卞相泰로 하여금 경남 昌原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케 하였으며, 上海臨時政府에 軍資金을 지원하는 한편 유림들의 「巴里長書」 를 영문으로 번역케 하고 5천원을 여비로 제공하며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광진과는 조선국권회복단과 대구의 3.1운동 당시 함께 활동했으며, 개인적 으로도 막역한 친구���이였다. 김광진의 ��海岳文集��과 ��家歷��에 윤상태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27) 이 4편의 시조들은 초고에는 있으나 문집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시조들의 원문과 해석은 다음의 글에 실려 있다. 박지현 · 이훈상, 앞의 책(총서 1권), 2015. 28) ��東亞日報��1930년 12월 23일.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http://www.koreanhistory.or.kr 29) ��家信��, 1940년 3월 21일 편지, 춘해보건대학교 역사관 소장. 30) ��家歷��1932년, 1936년, 춘해보건대학교 역사관 소장. 31) 박지현, 앞의 글, 2014, pp. 256-259. 32) ��海岳文集��, 卷1 「機學」의 <機 2>(41면), <知機法>(46면), <應機與察機(其二)>(48면), <見機法>(60면) 참고. 33) 김광진은 베이컨의 “경험론”을 예로 들며 과학적 지식의 힘을 강조하며, 지혜의 근원이라고 말한 바 있다. ��海岳文集��, 卷1 「機學」의 <讀史與察 機>(52면) 참고. 34) 이것들은 동시에 ��해악문집��의 편명을 이루기도 한다. ��海岳文集��, 「守進」, 「奇正」, 「屈伸」, 「浮沈」참고. 35) ��海岳文集��, 卷1 「機學」의 <機 2>(41면)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