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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활동에 매진하던 김광진은 1914년 서울로 가서 대종교 당(大倧敎堂)에 입당하여, 전국순회 전도 강연을 하기도 했 다. 15) 1915년에는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回復團)의 교 육부장으로 활동했고,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대구 의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김광진은 그 해 8월 조선국권회복단 활동과 3·1운동 참여, 임시정부와의 내통 혐의로 수배되었고, 16) 경찰의 눈을 피해 문경에 은신했다. 이후 다시 언양 향반들의 주요 세거지인 상북면 궁근정리에 사는 정회조(鄭檜朝, 1883-1927)의 집 에서 3개월간 숨어 지내게 되었다. 17) 「연보(年譜)」에는 김광진이 정회조의 집으로 피신을 간 이 유가 정회조의 아들인 정인락(鄭寅洛)이 그의 제자였기 때 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18) 아마도 김광진이 1912년 무렵 청 도의 공암학교에서 정인락을 가르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언양의 서북쪽 경계에 있는 청도군 공암리는 궁근정리에서 약 40리(16km) 정도 떨어져 있다. 19) 그렇지만 정인락이 어 린 나이에 이 거리를 통학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된 다. 추측컨대 정회조가 아들을 청도에 유학을 보내 교육하 게 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상북면에 최초의 교육기관인 길천공립보통학교가 세워진 것이 1927년이고 가장 가까운 언양공립보통학교도 1913년에야 설립되었던 상황으로 볼 때, 20) 정인락이 신학문 을 배우기 위해서는 청도 공암리까지 유 학을 가야만 했을 것이다. 김광진과 정회조의 교유를 이해하기 위 해 정회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회조는 언양의 8대 성 씨 가운데 하나인 동래 정씨로, 21) 당시 언양에서는 문사로서 문명文名을 날리던 인물이었다. 현재 정회조가 1918년 쓴 언양 보은리 우사곤(禹師鯤, 1795-1862)의 효자각 현판이 전하고 있다(도2). 22) 또한 정회조는 1924년 í��창선지략(彰善 誌略)��이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이 책에는 효행, 우애, 교육 사업, 자선, 기부 등 선행을 한 전국의 인물들의 생애와 업적 이 적혀있다. 이렇듯 정회조는 비록 자신은 신학문을 배우지 않았지만 새 로운 시대에 신사상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고, 또 문학과 저술로도 이름을 알렸던 유교 지식인이었다고 생각된다. 또 한 언양의 3.1 운동과 항일운동은 상북면의 인사들을 중심 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23) 김광진이 자신과 비슷한 사상과 성향을 지닌 정회조의 집으로 피신했던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2. 지적 전환과 민족운동 경북 의성군 비안면의 향반(鄕班) 가문에서 출생한 김광진 은 전통적인 유교적 환경 속에서 교육받고 성장했다. 유년 기에는 특히 시에 조예가 깊어 16세에 1,000여 수에 달하는 시를 남겼고, 17세에는 그의 재능을 들은 비안현감 임병두 (林秉斗)의 부탁으로 그의 자제를 가르칠 정도였다고 한 다. 7) 20세가 되던 1904년에는 두 차례에 걸쳐 안동과 예안, 청주 지역의 유학자들을 방문하여 강회(講會)에 참석하고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8) 이 여행에서 김광진은 ‘중국문명[華 夏]을 존숭하고 오랑캐를 물리치고자 했던 송시열(宋時烈) 의 대의(大義)를 우러른다.’고 했는데, 9) 명분과 의리를 중시 하는 전형적인 유자(儒者)로서의 풍모가 드러난다. 이렇듯 전형적인 유자의 길을 걷던 김광진이 지적 전환을 하 는 큰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일제에게 사실상 주권 을 침탈당한 1905년의 을사조약이었다. 한국의 민족운동의 전개와 마찬가지로 을사조약을 경계로 김광진도 세상을 바 라보고 실천하는 것에 큰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 구체적 인 양상은 1906년경 대구의 우현서루(友弦書樓)에서 동서 양의 학문을 폭넓게 섭렵하려 한 것이었다. 우현서루는 대구의 민족운동가 이일우(李一雨)가 세운 일 종의 사설 도서관이었다. 10) 여기에는 새로운 근대 문명을 소 개하는 책들과 동서양의 고전들이 수천 권이나 소장되어 있 었다고 한다. 더불어 새로운 지식을 갈구하는 각 지역의 청 년들에게 숙식까지 제공하여 마음껏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곳을 거쳐 간 유교 지식인들 중에는 장지연이나 박 은식, 조성환 등이 있다. 11) 우현서루에서의 수학(修學)은 김 광진에게 매우 큰 지적 자극을 주었고, 그리하여 그는 전통 학문의 한계를 크게 느끼게 했던 것 같다. 그는 우현서루에 서 수학(修學)하던 지인들과 함께 인근의 보수적인 유림들 을 찾아다니며 의복을 바꾸고 신문학을 수용할 것을 설득했 다고 전하는데, 이것은 당시 유교 지식인들이 겪었던 지적 곤경과 이를 둘러싼 유교 지식인들의 다양한 현실 대응 방 식을 보여준다. 12) 이렇듯 비안에서 유자로 살아왔던 김광진 에게 대구의 우현서루에서의 수학(修學)은 전통에서 근대 로의 지적인 전환을 하도록 만든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을 것 이다. 1910년 대구 협성 학교(協成學校, 현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한 김광진은 보 다 적극적으로 신학 문을 학습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도1). 당시 협성학교의 교육과정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김광진 이 1910년에 자신이 필사한 ��산술일과(算術日課)��와 1911 년에 등사된 ��헌법정리(憲法精理)��를 통하여 그의 학습 내용을 추정해 볼 수 있다. 13) 이어 2년 후인 1912년에 협성 학교를 졸업한 김광진은 청도 공암학교와 대구의 명신학교 (明新學校)에서 교사생활을 하였다. 14) 177 광복, 다시 찾은 빛_굳은 의지와 진실한 마음으로 만든 미래 176 | 7) 金永韶, 「年譜」, ��海岳文集��, 549면. 8) 金光鎭, ��海岳文集��卷19 「書記祭文」의 <八月路征記>, <九月路征記>를 참고. 9) 金光鎭, ��海岳文集��卷19 「書記祭文」의 <九月路征記> : 仰感先生大義垂, 尊崇華夏攘蠻夷, 至今有淚華陽洞, 杳杳梧雲二帝祠. 10) 李一雨와 그의 아버지 李東珍의 遺稿를 합하여 간행된 ��城南世稿��에는 우현서루의 설립 배경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李東珍 · 李一雨, �� 城南世稿��, <遺事> 참고. 11) 최재목, 2009, 「일제강점기 신지식의 요람 대구 「友弦書樓」에 대하여」, ��동북아문화연구��제19집, 동북아문화학회, pp. 211-225. 12) 李寅梓, ��省窩集��卷2, 「答金光鎭」, 192면 : 繼聞友弦書樓志士數人, 遍訪林下, 熱誠勸告未知勸告之趣旨云何, 而槪想宏譚偉論, 有足以聳 動觀聽. 13) ��算術日課��와 ��憲法精理��의 해제와 원문은 다음의 책에 실려 있다. 박지현 · 이훈상, 앞의 책(총서 1권), 2015. 14) 김광진의 <연보>에는 공암학교라고 나와 있다. 金永韶, <年譜>, ��海岳文集��, 549면. 그러나 한말 청도군의 근대교육의 현황을 살펴보면, 운문 면 공암리에 있었던 학교의 이름 은 사립 도동 학교로, 지역인사인 윤대섭이 1906년에 설립한 소학교뿐이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http://m.grandculture.net) <청도군 근대교육> 참고. 따라서 <연보>의 내 용은 공암리에 있는 학교라고 이해해야 맞을 것이다. 15) 金永韶, 「年譜」, ��海岳文集��, 549면. 16) ��韓民族獨立運動史料集��8, 1919년 8월 5일 大邱 地 方法院 豫審掛調書, 地檢秘 제570호,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http://www.koreanhistory.or.kr 17) 金永韶, 「年譜」, ��海岳文集��, 549면. 18) 金永韶, 「年譜」, ��海岳文集��, 549면. 정회조에게는 寅寀(1905-?), 寅祥(1914-1942), 寅完(1919-195 1) 세 아들이 있었다. 그의 세 아들 가운데 1912년에 소학교에 다닐만한 아들은 인채 뿐이다. 따라서 정인락은 정인채가 개명한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東萊鄭氏彦陽入鄕祖南隱公六代孫必中派世系��( http://yongmo33.cafe24.com/index.htm) 참고. 19) 언양읍에서 청도군 경계인 은피(지금의 생금점)와는 31리 거리에 있다. ��彦陽邑誌��(1916 · 1919) 「地界條」참고. 20) 홍은정, 2009, 「일제시기 面職員의 존재형태와 해방 후 활동」, ��역사와 세계��35, p. 245. 21) 남연숙, 1994, 「조선후기 향반의 거주지 이동과 사회 지위의 지속성(Ⅱ) - 언양 못안골 창녕 성씨 가문을 중심으로- 」, ��한국사연구��84, p. 52. 22) 언양 보은리 우사곤의 효자정려 과정과 효자각에 대해서는 다음의 책을 참고할 수 있다. 손숙경, 2015, ��조선후기 언양군 보은리의 단양 우씨 가문과 이들의 고문서��, 동아대학 교 석당학술원 한국학연구소. 23) 하유식, 2010, 「울산군 상북면의 농지개혁 연구」,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p. 23-24. <도1> 협성학교 재학시절의 김광진 (2열 우측에서 두 번째) <도2> 정회조가 쓴 우사곤 효자각 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