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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이 뒤늦게 빛을 보게 된 것은 1952년 7월 동생 서 수인이 시인 김장호와 윤석중의 도움을 받아 유고동요집 í�� 봄편지��(자유문화사)를 펴낸 뒤부터였다. 형님이 돌아가신 지 벌써 9해. 그동안 아우로서 형님을 그리 는 마음은 누구보다도 간절하였습니다. / 살아 계실 적에 남 다른 불구의 몸으로 평생 쓰라린 생활을 겪으신 형님. 형님의 모습은 벌써 이 누리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어디로 외쳐도 말없는 형님. 다만 형님이 지으신 귀여운 동요 만이 읊는 아우의 목청에 울려 형님의 소리 아닌 형님의 마음 소리가 들릴 뿐입니다. / 이제 이 땅에도 우리의 노래가 그리 웁게 들려옵니다. 그 노래 노래 사이에 섞여 ‘연못 가에 새로 핀……’ 하고 형님이 남기신 그리운 노래가 들려 올 때 나는 남다른 감격에 북바쳐 가슴의 뜨거움을 느꼈습니다. 서수인, 「��봄편지��를 엮으면서」가운데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 1968년 10월 3일 윤석중이 이끄는 새싹회와 울산문화원 주도로 울산시 학성공원에 「봄편지」 를 새긴 노래비가 세워지면서, 우리 문학사에서 당당하게 자리잡게 된 셈이다. ‘봄편지’ 노래비 건립취지문에서 ‘우리 겨레로 하여금 희망을 잃지 않게 해주었던 노래를 슬기롭게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선사하는 바입니다’라고 새겨두었 듯이, 나라잃은시기 서덕출의 문학사랑과 나라사랑을 높이 기리고 있다. 또한 윤석중(1980)은 그의 작품을 ‘방에 갇힌 그에게만 봄소 식을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눈뜬 장님, 듣는 귀머거리, 말하 는 벙어리 구실을 하면서 일인(日人)에게 눌려 지내던 우리 겨레에게도 크나큰 희망과 기쁨을 안겨주었으니 부자유(不 自由) 속에서 자유를 노래한 그의 모습은 곧 우리 겨레의 상 징’이라고 값매김 했다. Ⅲ. 서덕출의 동시 세계 1. 순수 동심과 겨레사랑 여러 동시들이 그렇듯이 서덕출의 작품 또한 아이들의 생활 속에서 만나는 대상을 제재로 삼아 순진무구한 세계를 담아 내고 있다. 그가 소재로 삼은 동·식물, 계절, 자연현상 등은 어린이의 순수 동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문 학세계는 자연을 대하는 그의 따뜻한 시선과 세밀한 관찰 력, 뛰어난 상상력과 어우러져 있다. 그의 작품은 어린이의 삶에서 자연스레 우러나온 순수 동심의 소산인 것이다. 송이송이 눈꽃 송이 / 하얀 꽃송이 / 하늘에서 피어 오는 / 하 얀 꽃송이 / 나무에나 뜰 위에나 / 동구 밖에나 / 골고루 나부 끼니 / 보기도 좋네 「눈꽃 송이」가운데 이 동시는 1934년 1월 23일 지은 작품으로 그의 순수 동심 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하얀 꽃 송이”이며, “나무에나 뜰 위에나 동구 밖에나” 할 것 없이 공 평하게 내리니 “보기도 좋”다고 노래했다. 이 작품을 통해 서덕출은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이겨내면서, 더불어 차별을 극복하려는 평등사상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 「눈꽃 송이」는 박재훈에 의해 개사·작곡되어 애창되고 있다. 이 처럼 서덕출의 동시는 순진무구의 동심을 보여주곤 있지만, 한편으로 애상적 동심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는 평생을 불구의 몸으로 살아야 했던 개인과 시대현실의 정서와 맞닿 아 있다고 하겠다. 변세화(1991)는 서덕출을 두고 ‘그의 작품에는 시대의 음영 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자아를 중심으로 한 내외의 명 암뿐이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서덕출은 신상의 불우로 자 기 비애와 감상에만 빠져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지를 주문해서 그에게 읽게 했다. 그러한 부모의 보살핌과 뒷바라지 속에서 그는 문학에의 뜻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그 는 평소 동시를 즐겨 지었고, ��어린이��잡지에 투고해 왔다 고 여겨진다. 1925년 5월 어린이잡지 ��어린이�� ‘독자란’에 「봄편지」가 입선되어 발표되면서 동요작가로서 알려지게 된다. 열아홉의 나이에 쓴 동시 「봄편지」는 서덕출의 등단 작인 셈이다. 연못 가에 새로 핀 / 버들 잎을 따서요 / 우표 한 장 붙여서 / 강남으로 보내면 / 작년에 간 제비가 / 푸른 편지 보고요 / 대 한 봄이 그리워 / 다시 찾아 옵니다 「봄편지」전문 서덕출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이 동시는 “제비”가 “버들 잎”을 따서 보낸 “푸른 편지”를 읽고 “대한 봄”이 찾아온다 는 내용이다. “봄편지”로 형상화되는 이미지가 어린이에게 희망을 주고, 넓게는 조국의 광복을 열망하는 의미로 나아 가고 있다. 그의 동시 「봄편지」는 윤극영에 의해 작곡된 악보가 ��어린 이��1926년 4월호에 실렸다. 하지만 나라잃은시기 일본인 들은 이 동시를 못마땅하게 여겨, 장애자의 비애를 노래한 작품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아울러 이 동시는 1927년 10월 10일 <색동회> 주관의 열린동요회에서 김영복의 독창으로 불려지면서 다시 한 번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때 동요 회의 사회를 맡았던 방정환이 서덕출의 불우한 처지를 소개 하자, 누군가 “그 가련한 조선의 천재(天才)에게 위안(慰安) 의 정과 감사(感謝)의 뜻을 표하기 위하여 우리의 힘으로 조 그마한 선물을 하자” 는 제의가 나왔고, 참석자들이 그 자리 에서 모금운동을 벌여 “만년필” 한 자루를 마련해 그에게 보 내기도 했다. 이같은 내용은 1927년 10월 12일자 ��조선일 보��와 ��동아일보��에 기사화되었다. 이로써 서덕출은 “조선 의 천재” 또는 “동요의 천재”라는 명성을 얻었고, 문단의 찬 사를 받았던 것이다. 이후 서덕출은 ��어린이��를 비롯해 ��신 소년��, ��새벗��, ��아동 문예��, ��학생��, ��아이생활��등의 여러 잡지와 ��동아일보��, �� 조선일보��, ��중외일보��, ��중앙일보��등의 신문에 꾸준히 작 품을 발표했다. 갈래별로 나누어 살펴보면, 동시·동요와 소 년시, 작문·콩트·편지 등의 산문작품, ‘독자담화실’에 게재 된 기타자료 등이 있다. 이렇듯 그는 동시와 소년시, 산문에 이르기까지 작품활동을 열정적으로 이어갔다. 오동나무 비바람에 잎 뜨는 이 밤 / 그리웁던 네 동무가 모여 습니다 / 이 비가 끗치고 날이 밝으면 / 네 동무도 흩어저 떠 나갑니다 // 오늘 밤엔 귀뜨람이 우는 노래도 / 마디 마디 비 에 젖어 눈물납니다 / 문풍지 비바람 스치는 이밤 / 그리웁던 네 동무가 모여습니다 「슯흔 밤」전문 1927년 8월 9일, 윤석중의 주선으로 서울의 방정환, 대구의 윤복진, 언양의 신고송 등의 문우들이 울산 복산동 서덕출 의 집으로 찾아왔다. 이 동시는 그때 서덕출을 찾아왔던 신 고송・윤석중・윤복진과 합작으로 지은 작품이다. 비오는 밤 에 그립던 동무들이 모였지만 “비가 그치고 날이 밝으면” 각 각 흩어져서 떠나야 하는 시간, 그리고 동무들과 못내 헤어 져야 하는 아쉬움을 “귀뚜라미 우는 노래”인양 “비에 젖어 눈물” 흘리는 슬픈 밤에 빗대어 노래하고 있다. 1934년 11월 서덕출은 전필남(全必南)과 혼인하였다. 슬하 에 양자(良子)와 대진(大振) 남매를 두었다. 결혼 뒤부터 그 는 가장으로서 가계를 꾸리기 위해, 약제사 시험을 준비했 고, 1935년 약제사 시험에 합격하여 ‘애생당(愛生堂)’이라 는 신약방을 차렸다. 하지만 그는 1938년 가을 무렵부터 척 추병이 악화되어 오랜 시간을 병상에서 지냈다. 그러다 1940년 서른넷의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이렇듯 서덕출이 남긴 작품은 그의 문학살이가 고스란히 담 겨 있는 삶의 궤적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서른네 해의 세상 살이 동안 작품집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우리문학사에서 점 차 잊혀져 갔던 것이다. 167 광복, 다시 찾은 빛_굳은 의지와 진실한 마음으로 만든 미래 16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