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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보아 단순히 문화적 사업인 듯이 하고 있으나 실은 앞으로 언제인가 나라를 되찾을 것이고, 그때 새로운 민주 시민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므로 시 작한 준비 작업의 하나였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고유한 언 어, 고유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일본인과는 전혀 다른 민족 이라는 것을 세계에 알리고 우리의 독립운동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도 국어사전이 필요했었다. 국어사전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고유한 언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큰사전』이 1945년 10월 9일에 첫째 권, 1947년 5월에 둘째 권이 나왔다. 외솔선생은 이 조선어사전 편찬회의 준비위원이며 집행위원이었다. 또 이 사전은 외솔 선생의 문법체계를 따라 편찬한 것이다. 조선어학회는 해방 전에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마련하고 표 준어를 사정했으며 『큰사전』을 만든 국어 연구, 국어 운동 단체로서 해방 당시에 우리나라 우리말과 글의 정책을 뒷받 침 하고 있던, 그리고 우리 국민의 말·글 생활을 주도하던, 우리말에 관한 가장 권위가 있는 학회였다. 외솔선생은 1948년 9월에 편수국장을 그만두고 조선어학 회로 돌아가 상무이사로, 또 이사장으로 조선어학회의 일을 보면서 학회가 주관하는 ‘세종 중등교사 양성소’의 교수로 일하기도 하였다. 외솔선생은 시급한 국어교사의 수급을 위 해 단기 교육을 해서 자격증을 가진 국어 교사를 양성할 목 적으로 임시로 차린 ‘세종 중등교사 양성소’에서 뿐만 아니 라, 정식으로 사범교육을 받고 있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서도 국어문법을 가르쳤다. 한편 1949년에는 ‘한글전용촉진회’의 위원장이 되어 한글전 용의 실현을 위해 정리 했다. 한글전용을 위한 그의 노력은 그 후로도 돌아가실 때 까지 계속되었다. Ⅳ. 외솔선생님! ‘나라사랑의 길’을 되새겨 보며 1. 국어 연구와 운동, 그리고 학문적 업적 외솔 최현배선생의 광복이후 활동의 큰 줄기는 우리말과 글 의 지속적인 연구, 새 나라의 교육, 고유문화 육성 및 한글세 대의 형성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외솔선생은 우리말·글의 연구에 관한 수많은 글을 연구논문으로 발표하였고. 우리 교육을 위해 두 번에 걸쳐 편수국의 책임을 맡아 국민교육 바탕부터 교과서 편집, 도덕교육 정착, 고등교육에 온 힘을 쏟았다. 특히 외솔선생은 ‘한글간소화 안’에 대하여 ‘이는 우리 문화 의 퇴보를 가져올 것이며,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 는 어리석은 일’이라는 강한 비판을 하면서 반대하였다. 1957년 10월 9일 한글날 드디어 민족의 숙원인 우리말 『큰 사전』 6권이 완간되었다. 이것은 1929년 10월 사전편찬을 발기한지 꼭 28년만의 일이었다. 문화면에서는 한글학회를 중심으로 ‘큰사전’ 편찬, ‘한글의 기계화’, ‘우리 말·글다듬기’ 펴기에 온힘을 힘을 쏟았다. 생 활 철학은 역시 ‘조선민족 갱생의 도’의 기본사상인 「살음」 사상의 실천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것은 결국 광복된 조국 이 잘 살면서 발전하기 위한 ‘나라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다 고 보고, 나라사랑에 대한 이론서인 『나라사랑의 길』을 1957년에 펴냈다. 외솔 최현배선생의 광복이전 활동에는 국 어연구와 언어정책, 그리고 일제의 수난으로 구분된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국어연구 활동으로 ‘우리말본’과 ‘한글갈’의 지음을 들 수 있다. 언어정책적인 것으로 ‘사전편찬’ 사업, ‘맞춤법통일안’, ‘표준어사전’ 및 ‘외래어표기법제정’ 등이 있 다. 이러한 연구와 우리 글 언어정책은 결국 일제의 강압과 폭력의 수난을 당하는 요인이 되어 ‘흥업구락부사건’과 ‘조선 어학회 사건’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1953년 4월에 현행 맞춤법이 너무 어려우니 이를 폐지하고 한글맞춤법통일안 이전의 옛 철자법으로 고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국무총리의 훈령이 공포되고 그에 따른 맞 춤법 간소화 안이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발표됨으로써 이른 바 ‘한글파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각계각층의 격렬한 반대 로 약 2년 만에 없던 일이 되었지마는 이 사건으로 외솔은 1954년 1월에 편수국장을 그만두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고, 오늘까지 이어져 그 후에 들어 온 서양 외래어까지 우리말로 순화하여 쓰고자 하는 노력으 로 살아 있다. 외솔 선생의 한자 안 쓰기와 한글 가로쓰기의 주장이 그대로 정책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수십여 년 동안 한글만 쓰자는 이른바 한글전용론자들과 한 자와 한글을 섞어 써야 한다는 한자혼용론자들이 줄기차게 치열한 논쟁을 벌여오고 있다. 이제 겨우 한글만 쓰기가 정착되긴 하였으나, 2018학년도 부터 또다시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함께 넣자(한자병 기)는 안이 고개를 들어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우 리 말·글만을 위해 한 평생 나라사랑, 겨레사랑을 하시다 돌 아가신지 쉰 해 가까이 되어가지만, 한자혼용론의 불씨가 아직도 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다. 1951년 1월 20일에 다시 문교부편수국장에 취임하여 편수 국 일을 보는 중에 그는 우리말에 쓰이는 글자와 낱말의 사 용빈도 조사를 하였다. 그가 편수국장 일을 그만둔 후 1955 년에 문교부에서 펴낸 『우리말에 쓰인 글자(한글, 한자)의 찾기 조사』와 1956년의 『우리말의 말수 찾기 조사』가 바로 그것이다. 한글의 사용빈도 조사는 타자기 등의 자판에 어떤 글자를 어 떤 위치에 배열한 것인지를 정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통 계 자료였다. 한글의 기계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외 솔 선생이 아니고는 발상이 어려운 작업이었다. 한자의 사용빈도 조사도 아직 한자를 많이 쓰던 당시에 한 자를 줄여 쓰자면 상용한자 제정 등에 꼭 필요한 정보였고, 단어의 사용빈도 조사는 초·중등학교의 단계적인 교재를 만드는 데도 반드시 있어야 할 자료였다. 저학년 교재에 사용빈도가 낮은 어려운 단어를 써서는 안 될 것이다. 공식적인 학습 교재뿐만 아니라 유치원, 초등, 중등 학생들을 위한 일반 읽을거리를 만드는데 있어서도 사용빈 도가 높고, 쉬운 단어부터 시작해서 차츰 단계별로 그 정도 를 높여가야 한다. 진정으로 국어 교육을 걱정하지 않고서 는 생각해 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국내에서 어휘의 사용빈 도 조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극히 최근에 컴퓨터 작 업을 할 수 있게 된 이후이다. 외솔 최현배선생은 그만큼 시 대를 앞서 가고 있었다. 외솔 최현배 선생은 학자로서 공무원으로서 공사(公私)를 분명히 하였다. 문교부 편수국장 시절 학자이었기 때문에 직업 공무원이 할 수 없었던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 볼 수 있 다. 그것은 학자로서 깊이 생각한 끝에 내린 판단을 끝가지 밀고 가는 끈질김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 당시 한 모 든 일에 걸쳐 살펴 볼 수 있다. 만약, 문교부 편수국에서 외 솔 선생의 그러한 정확한 판단과 끈질긴 추진력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교과서 편찬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을 것이고, 제 대로 된 교과서가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3. 조선어학회로 돌아가 『큰사전』등 펴냄 우리의 말과 글을 바로 세우기 위한 외솔의 노력은 편수국 밖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져 나갔다. 1946년 9월에는 ‘한글가 로쓰기연구회’를 창립하고 1947년 5월에는 위에서 말한『글 자의 혁명』을 출판하여 그의 주장을 사회에 널리 알리고 있 었다. 또 조선어학회의 『큰사전』일에도 힘을 쏟아 미국 록 펠러 재단의 후원을 얻어 출판의 길을 열었다. 『큰사전』을 펴낸 것은 1929년 10월에 사회 각계인사 108인 이 모여 ‘조선어사전편찬회’를 구성하여 시작한 것으로 이는 우리나라 최초로 표준말을 사정하여 한글맞춤법에 따라 편 찬한 국민의 바른 말·글 생활을 위해 만든 사전이다. ‘조선 어사전편찬회’는 그 취지문에서 “인류의 행복은 문화의 향 상을 따라 증진되는 것이요, 문화의 발전은 언어, 문자의 합 리적 정리와 통일로 말미암아 촉성되는 것이다. 말과 글의 정리와 통일은 제반문화의 기초를 이루어 인류 행복의 원천 이 되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문화발전에 뜻이 있는 민족은 언어, 문자의 정리와 통일을 시급한 일이라 생각 않은 자가 없고 이를 위해서는 표준 사전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아 직 그러한 사전이 없어 이러한 사업이 필요하다는 뜻을 밝 히고 있다. 161 광복, 다시 찾은 빛_굳은 의지와 진실한 마음으로 만든 미래 16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