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page

민족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사랑에서,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기 시작한 주시경 선생에서 그 정신적 유산을 이어 받 은 외솔 최현배선생이 민족문화를 계승·발전시키려는 정신 에서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나아가 민족문화는 민족정 신과 직결되는 것임을 누구보다도 투철하게 인식하고 있던 사람도 외솔 최현배선생이었다. 선생의 학문은 이런 각도에 서 보아야 한다. “한 겨레의 문화 창조의 활동은, 그 말로써 들어가며 그 말로써 하여 가며, 그 말로써 남기는 것”임을 깊 이 인식하고, 우리민족의 “창조적 활동의 말미암던 길이요, 연장이요, 또 그 성과의 축척”인 말을 연구한 결과가 『우리 말본』에 나타났고, 나아가서는 우리 민족의 “지적 산물 중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지적 탐구의 가장 긴밀한 대 상”이 되어야 하는 한글을 연구·체계화한 결과는 『한글갈』 로 나타났다. 이렇게 『우리말본』, 『한글갈』이 밑받침 되어 그 뒤를 이어 『글자의 혁명』, 『한글의 투쟁』, 『한글 바로적 기 공부』, 『배달말과 한글의 승리』, 『한글만 쓰기의 주장』등 발전한 학문이 연이어 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외솔 최현배선생이 펴낸 『우리말본』과 『한글갈』은 국어학 의 금자탑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한(恨)·그리운 삶의 노래 한의 노래는 사람의 깊은 삶, 희노애락(喜怒哀樂) 본연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표현이다. 슬프면 슬픔대로 기쁘면 기쁨으 로 나타내어진다. 그 가운데 아리랑, 한 오백년 등 지역 간 처한 환경에 따라 조금씩 표현을 각기 달리한 한(恨)으로 표출되어 공감를 형 성해 나타난 것이므로 우리 겨레 삶의 혼이 담겨져 있어 함 께 할 수 있다. 나라 잃은 시대의 아픔으로 내 나라에서 외세의 침탈, 강압 으로 옥중에서 함께 온 동지가 고초를 이기지 못해 운명을 달리 할 때 그 아픈 마음과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죄인 아닌 중죄인의 삶이란 어떠했을까? 그런 과정에서도 외솔선생은 다음과 같은 옥중시를 썼다. 임 생각 임이여 어디 갔노, 어디메로 갔단 말고? 풀나무 봄이 오면, 해마다 푸르건만, 어찧다 우리의 임은, 돌아올 줄 모르나. 이렇게 4연까지 이어지는데, 조국의 임을 그리는 내용이 구 구절절 배어있다. 이 밖에도 1943년 8월13일 함흥 형무소에 서 1945년 8월17일 풀려 나올 때까지 여러 편의 시조를 남 겼다. 그 가운데 현실의 감옥 고통스런 삶과 나라사랑, 겨레 사랑 그리고 고향을 절절히 그리는 마음을 되새겨 보면 고향 생각 내 고향은 병영이다 경상도 좌병영이 날 길러준 이 고장이 언제나 나의 그림 그림을 한 아름 안고 또 다시 들렀세라. 4. 외솔 정신을 이은 제자 윤동주 제자 윤동주가 외솔 선생의 나라사랑의 얼을 이어받아 저항 시로 실천하였다고 설성경교수는 ‘외솔정신을 계승(繼承) 한 애(愛)제자 윤동주의 시세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외솔 최현배선생은 1938년 이른바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경찰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고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에서 강제 퇴직되었다. 외솔 선생은 우리 문화가 진작되기 위해 서는 문화 창조의 도구인 국어의 어법이 바로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겨레의 문화 창조의 활동은, 그 말로 써 들어가며 그 말로써 하여 가며, 그 말로써 남기나니: 이 제 조선말은, 줄잡아도 반만년 동안 역사의 흐름에서, 조선 2. 한글갈 1938년 9월, 흥업 구락부 사건으로 외솔 선생은 연희전문학 교를 강제로 사직 당하자 ‘한글[訓民正音]’에 관한 모든 문 제를 연구·정리하기 시작하여 1940년 겨울에 『한글갈』을 완성해 내기에 이르렀다.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듯, 외솔선 생의 학문은 겨레사랑에서부터 시작되어 겨레 사랑으로 끝 나는데, 『한글갈』을 쓴 숨은 뜻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다고 했다. “한글(正音)은 조선 사람의 지적 산물 중 가장 중요한 것 인 동시에, 또 지적 탐구의 가장 긴밀한 대상이 아니면 안 된다.”(초판 머리말) 외솔 선생은 한 겨레의 말이나 글의 창조 발전도, 그 겨레의 정신적인 창조적 활동의 표현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한글’ 의 창조는 이 겨레의 창조적 능력을 자질할 수 있는 가장 좋 은 보기로서,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임을 꿈에도 잊지 않았다. “내가 한글 연구에 뜻한 지 꼭 서른 돌 해이라, 이것저것에 관한 단편적인 소견이 일찍부터 없지 아니하였으나, 기왕 에는『우리말본』의 지음과 가르치기의 바쁨으로 말미암 아, 손이 이에 미치지 못하였더니, 이즈음 수년 동안에 한 가한 몸이 되매, 온 시간을 오로지『훈민정음』의 연구에 바 침을 얻어, 부지런히 갈고 닦은 성과를 뭉뚱그려, 이에 세 상에 내어 놓게 된 것이다.”(초판 머리말) 외솔 선생의 이 저서는, 『우리말본』과 같이, 겨레사랑의 정 성에서 우러나온 것이나, 일제 말기의 단말마적인 탄압 아 래서는 그 심정을 털어놓을 자유마저 없었다. 그리하여 외 솔선생은 해방 뒤 1961년에 나온 고친 판의 머리말에서 그 때의 속 깊이 담았던 마음을 다음과 같이 풀어 놓고 있다. “이 책은 중일 전쟁이 점점 격렬해 갈 무렵에, 내가 폭탄이 서울에 떨어지기 전에, 이 몸이 전쟁의 화로 죽기 전에, 그 날 그때까지의 우리한글 동지들의 연구 결과를 적어서, 뒷 세상에 전하여야 하겠다는 나의 문화육성의 정성과 겨레 사랑의 의무심에서, 삼 년 동안에 밤낮 전심전력을 다하여 이뤄낸 것이다.” 흥업 구락부 사건으로 일터마저 쫓겨나게 된 선생은, “사회 적으로 가정적으로, 매우 어려운 형편에서 외롭고 초조한 마음으로” 서둘러 만들었음을 술회하고 있다. 그의 겨레 사 랑의 꿋꿋한 정성은 소나무 같이 굽힐 줄을 몰랐던 것이다. 『한글갈』이 책으로 나오던 1942년 5월 어느 날에 읊은 시조 를 보면, 학문의 기쁨과 무궁함을, 금강산의 경개의 무진함 에 비유하고 있다. 이렇듯 외솔 선생은 겨레와 학문에 대한 사랑으로 한 평생을 보내었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이 책은 『훈민정음』에 관한 일체의 역사 적 문제와 한글에 관한 일체의 문제를 크고 작고 망라하여, 이를 체계적으로 논구하여, 그 숨은 것을 들어내며, 그 어두 운 것을 밝히며, 그 어지러운 것을 간추려 써, 정연한 체계의 한글갈[正音學]을 세워, 우로는 신경준, 유회의 유업을 잇 고, 아래론 주시경 스승 가름침의 유지를 이루고자 하였다.” 『한글갈』은 크게 두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따라서 첫 째 매, 역사편, 둘째 매, 이론편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므 로 역사편에서는 훈민정음 창제, 한글 사용의 역사적 전개 상, 한글 연구의 역사를 통해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에는 우리말에 관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데 『한글갈』에서는 『훈민정음해례』의 학 설을 비롯해서 고전적 한글 연구 문헌을 하나하나 그 학설 의 상세한 소개와 비판을 전개하고서, 유길준, 주시경, 그리 고 해방 전까지의 한글에 대한 연구를 모두 다루고 타자기 의 글자판에 대한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 이론 편에서는 『훈 민정음』풀이, 없어진 글자의 소리, 한글의 기원, 한글의 세 계 글자에서의 지위, 견주는 한글갈 등 여섯 가지로 나누어 놓았다. 157 광복, 다시 찾은 빛_굳은 의지와 진실한 마음으로 만든 미래 15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