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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라 되살리는 길, 『조선민족 갱생의 도』 외솔 최현배선생의 신학문에 대한 향학열은 유독 남다른 데 가 있었다.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단 한 사람만 선발하는 관비유학생으로 뽑혔으나, 유학이 지정 된 곳이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의 일어 한문과 이였기 때문 에 처음에는 자신이 희망하지 않은 학문을 해야만 할 것인 가에 오랜 번민을 하다 결국 유학할 것을 결심하고, 그 후 4 년 동안 이 학교에서 일본 문학과 한문학을 배웠다. 그러나 외솔 최현배선생은 교육학을 다시 전공하여 히로시마고등 사범학교 문과 제1부를 졸업하였다. 이 과정에서도 여러 가 지 어려움을 많이 당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대학 재학 중 항 일사상이 강하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에 불려가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병을 핑계로 고향 울산에 돌아와 동래고등보통학교 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우리말을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우 리말본』의 초고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외솔 최현배선 생은 나라의 독립과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는 우리민족과 사 회개조를 위한 능력배양이 우선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더 배워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사회발전과 개선 방법을 연 구할 목적으로 1922년 다시 일본 유학의 길을 떠나 교토대 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처음에는 사회학을 전공하였으나, 민족개조와 사회개선의 근본책이 교육에 있음을 알고 교육학을 중심으로 한 철학, 윤리학, 사회학, 심리학을 두루 배우면서 우리말 연구의 이 론적 기반을 차근차근 쌓아갔다. 외솔선생은 교육학을 전공하면서 페스탈로찌의 교육학을 체계화 하려는 학문적 목적 아래 1925년 졸업논문으로 “교 육학은 본질적으로 이성에 관한 깊은 과학이어야 한다”는 ‘페스탈로찌의 교육학설’을 썼다. 또 여름방학을 이용 귀국 해 전국 순회 강연회를 가지며 ‘우리말의 맞춤법’에 대한 강 의를 하였다. 외솔선생은 우리 겨레에 대한 사랑하는 길은 입으로나 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몸과 행동으 로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26년 외솔 최현배선생은 영원히 남을 『조선 민족 갱생의 도(朝鮮民族 更生의 道)』’를 썼다. 조선 민족의 대다수를 식민지 문맹 상태로 억류하고 민족의 식을 말살하려 할 때, 외솔 최현배선생의 『조선 민족 갱생의 도』는 우리 민족이 다시 사는 실천상의 이상을 보인 것이며, 외솔 선생의 학문 연구와 민족 문화 운동은 그 이상의 기본 적인 실천이었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이어 나가매, 우선 갱생 의 도 바닥에 흐르고 있는 정신은 무엇이고, 민족의 쇠약과 병증은 무엇이며, 또, 그 갱생을 위하여 민족이 걸어야 할 참다운 실천적 이상의 길은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그 길을 몸소 걷기 위하여 어떻게 몸소 실행 하였는가를 밝혀보기로 한다. 『조선 민족 갱생의 도』의 논문을 쓰게 된 배경과 동기를 살 펴보면, 그는 일찍부터 남보다 앞지르는 예리한 판단력을 가진 그의 시각으로 바라본 조선조 500년의 사상적 바탕으 로 유지해 온 유교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그 사상에서 파생 되는 서당식 한문 교육의 폐해를 먼저 제시하였다. 서당식 교육은 국민의 지적 쇠약증을 가져와 온갖 고질병을 일으킨 원인임을 밝히면서,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이 심화 되는 역사적 현실 앞에서 민족이 다시 살아날 방법을 모색 하며 논문을 썼다. 또 이 논문이 나오기까지 외솔선생의 심 정을 살펴보는 것도 이 논문이 쓰인 배경과 동기를 짐작하 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그 심정을 살핌으로써 우리는 외솔 최현배선생의 확고한 인생관과 국가관 및 민족관을 읽어낼 수 있다. 그 줄거리를 살펴보면, 민족이 중병과 쇠약증에 걸 려 있음을 병리학적으로 진단하되, 그 결과는 의지의 나약 함, 용기의 없음, 활동성의 부족함, 신념의 부족 등이 원인이 라고 보고, 그 치유 방법으로 민족개조의 근본책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 것을 들면 도덕경장, 경제 진흥, 생활방식 개선, 민족고유 문화의 떨침 등의 근본책이 그것이다. 그리고 쇠약의 원인으로 조선 500년간의 악정과 자각 없는 교육을 들었다. 이 논문의 근본철학은 물질에 대한 정신의 상위지배이며, 근본사상은 창조, 생기, 살음, 신념으로 민족 랄한 비판을 하고 있다. 이것은 서당 교육이 우리 겨레의 창 의력, 독립성, 자주성을 키우는데 매우 큰 장애 요인 되었다 는 것을 말하고 있다. 외솔선생이 쓴 글에 의하면 서당 교육을 마치고 나이 14살 되던 해, 때마침 신식교육기관인 일신학교(병영초등학교 전 신)에 들어가 새로운 교육과정으로 삼년간 신식교육을 배웠 다. 특히, 외솔선생은 수리와 논리적 사고과정, 스스로 공부 하는 태도와 방법을 익혀 일생동안 자신의 학문연구에 근본 으로 삼고, 자신 스스로 배우면서 가끔 또래 친구들을 가르 치기도 하였다. “1910년 일신학교를 마친 뒤 고향 선배들의 지도를 받고 서 울에 올라가 관립 한성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그 해 한일 합병으로 일제는 학교 이름도 경성고등보통학교로 바꾸고, 우리나라 사람이 지은 모든 교과서를 모두 몰수한 후 일본 식의 새로운 교육과정에 따라 공부를 하게 되었다.” 2. 기울어져 가는 나라와 주시경의 만남 외솔 선생의 서울 유학시절, 나라는 개화의 물결이 한껏 힘 을 받는 과정에 있었고, 선각자들도 활발히 노력했지만, 그 것이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곧장 일본의 식민지로 이 어지는 민족의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것은 당시 기득권층 들이 국제정세를 잘 파악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밀려오 는 외세의 물결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라 안의 준비가 부실 한 채 급속히 개화의 문을 연 것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한 원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885년(고종 22년)부터 한국 병합(한일합방)이 되기 전까지 신식학교가 세워지고 새로운 학교교육이 시작되면서 우리말과 글을 교과목으로 채택하 고 우리 글로 쓴 교과서에 의하여 교육이 이루어졌다. 이후 일본의 침략 야욕이 점차 표면화되어 가는 것을 알아차리 고, 뜻있는 학자들은 우리말과 글의 연구뿐만 아니라 신식 교육 보급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1876년에 맺은 강화도조약 자체가 너무나 불평등한 조약의 상태에서 시작 된 개화와 갑오경장에 의한 시대적 각 성은 민족 자각을 고 취하여 각종 저서와, 신문, 잡지 그리고 교과서에 이르기 까 지 모두가 한글로 쓰기에 이르렀지만, 외세의 물결을 받아 소화할 시간적 여유와 능력이 너무나 부족했다. 그런 어려 운 상황에서도 주시경선생이 지은 『국어문법』은 우리 말본 학의 창의적 체계를 구축한 것으로 국어 연구사에서는 획기 적인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는 근대 과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을 뿐 만 아니라, 특히, “국어는 우리 민족의 정신적 새김이요, 우 리의 생각과 행동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라는 민족주의의 언어관을 공유해 주시경 선생의 ‘말·글·얼’의 삼위일체 언 어관은 민족주의 언어관의 대표적인 것으로 만들어 내었다. 외솔 최현배선생은 주시경선생의 ‘조선어 강습원(한글 강습 원)에서 이러한 만남을 통해 우리말과 글의 교육뿐만 아니 라 민족주의 언어관을 몸소 체득하였다고 『나의 걸어온 학 문의 길』 글 속에 잘 나타내고 있다. 주시경선생은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닦은 신학문의 선구 자였으며, 민족정신의 형성기반이 되는 말·글의 연구·보급 을 통해 민족문화 발전에 이바지하신 분이다. 또 1907년 상 동교회에서 조선어 강습원(한글 강습원)을 설립해 일요일마 다 한글을 가르쳤고, 최현배선생은 1910년 경성고등보통학 교를 다니면서 박동보성학교 안에 매주 열리고 있는 조선어 강습원(한글 강습원)에서 주시경선생의 강의를 받았고, 1913년 3월 그 강습원에서 고등과정을 이수해 고등과 제1 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리고 17살 때인, 1910년부터 1913년 까지 조선어 강습원(한글 강습원) 고등과정을 우수한 성적 으로 졸업하고 동기들과 함께 ‘한글모’의 특별회원이 되어 회원들과 함께 ‘한글모’를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1914년 여름방학에 주시경선생의 간곡한 부탁과 격려의 말 씀을 듣고 부산 동명학교(현 동래고등학교)에 개설한 조선 어 강습원(한글 강습원)의 강사로 내려가 가르치다 주시경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받고 서둘러 서울로 올라갔다. 그런데 주시경 선생의 죽음은 외솔선생에게는 남달랐다는 것을 『나의 걸어온 학문의 길』 글에서 잘 나타내고 있다. 153 광복, 다시 찾은 빛_굳은 의지와 진실한 마음으로 만든 미래 15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