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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광복, 다시 찾은 빛_굳은 의지와 진실한 마음으로 만든 미래 148 | 이를 위해 공화주의와 복벽주의 계열의 인물과 단체를 통합 해 광복회를 조직했다. 1910년대 독립운동단체로는 유일하 게 전국적 조직을 갖추었고, 국·내외에 독립운동 거점을 설 치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의 독립운동은 1919년 3·1 운동 후 주비단과 광복단결사 대로 계승되었으며, 광복회의 의협투쟁은 1920년대 의열 투 쟁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다. 한다는 점에 주목해 통고문이 가장 많이 발견된 충청도 지 역을 중심으로 수사를 집중했고, 1918년 1월 천안에서 충청 도 지부원 장두환이 체포되었다. 이를 계기로 충청도지부장 김한종을 비롯해 광복회원들이 체포되기 시작했다. 6. 체포와 순국 박상진은 일제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경북 안동 하계마을 이 동흠(李棟欽)의 집으로 피신했다. 이동흠은 경술국치에 항거해 순국한 이만도(李晩燾)의 손 자이면서 광복회원이었다. 박상진은 이곳에서 머물다가 만 주로 망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만주 망명 직전 경주 본가에 서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경주 본가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일제의 광 복회원 검거바람이 불고 있는 상황에서 경주 집으로 돌아간 다는 것은 곧 체포를 의미했고, 사형을 선고 받을 것이라는 것이 예견되는 상황이었다. 만주 망명과 자식의 도리를 다 해야 하는 선택상황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박상진은 자 식의 도리를 선택했고, 1918년 2월 1일 경주 녹동 집에 도착 했다. 그가 경주 본가에 도착했을 때, 모친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 였고, 출상을 앞두고 있었다. 박상진은 상주의 도리를 다했 으나 곧바로 체포되고 말았다. 박상진은 공주로 이송되었다. 충청도지부원들이 먼저 체포 되면서 공주경찰서가 관할 경찰서가 되었고, 광복회원들의 재판도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루어졌다. 박상진은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1919년 9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상고가 기각 되었다. 박상진은 상고했으며, 1920년 3월 1일 고등법원은 경성복심법원의 선고를 파기하고 대구복심법원을 관할 법 원으로 지정해 이송했다. 고등법원의 파기 환송은 생부 박시규가 여러 명의 변호사를 투입해 구명활동을 벌인 결과였다. 그러나 9월 11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고, 1920년 11월 4일 고등법 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 박상진은 1921년 8월 11일 다음과 같은 유시와 절명시를 남 기고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어머님 장례 마치지 못한 채(母葬未成) 나라님 원수도 갚지 못했네(君讐未服) 빼앗긴 강토마저 되찾지 못했으니(國土未復) 이내 몸 무슨 면목으로 저승길 걸어갈까(死何面目) 다시 태어나기 힘든 이 세상에(難復生此世上) 다행히 대장부로 태어났건만(幸得爲男子身) 이룬 일 하나 없이 저 세상에 가려하니(無一事成功去) 청산이 조롱하고 녹수가 비웃는 구나(靑山嘲綠水嚬) 박상진. 그는 36년 6개월의 삶을 살았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기간은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으로 13년 정도다. 4년여 동안 투옥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독립운동은 8년여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가 독립운동사에 남긴 의미는 상당히 크다. 박상 진은 1910년대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통치가 실시되고 있는 국내에서 독립전쟁을 실현하고자 했다. 한말 국권회복운동 의 전통을 계승해 실력을 양성한 후 일제와 전쟁을 벌인다 는 것이었다. <참고문헌> 권대웅, 2008, 「1910년대 국내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희곤, 2000, 「고헌 박상진(1884-1921)의 생애와 자료」, 「박상진자료집」,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박걸순, 2014, 「독립전쟁론의 선구자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역사공간. 박영석, 1986, 「대한광복회연구-박상진제문을 중심으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한국민족운동사학회. 박중훈, 2001, 「고헌 박상진의 생애와 항일투쟁활동」, 「국학연구」6, 국학연구원. 이성우, 2007, 「광복회연구」, 충남대학교박사학위논문. 조동걸, 1989, 「대한광복회 연구」, 「한국민족주의 성립과 독립운동사연구」, 지식산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