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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같은 해 9월에는 김진만(金鎭萬)·정운일(鄭雲馹)· 김진우(金鎭禹)·권상석(權相錫)·임봉주(林鳳柱) 등과 대 구부호 서우순을 상대로 자금모집을 벌였다. 일명 ‘대구권 총사건’으로 알려진 광복회 자금모집 활동이었다. 그러나 자 금모집은 실패했고, 참여자 대부분이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박상진도 징역 6개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박상진은 1917년 출옥한 후 광복회의 투쟁역량을 강화시켰 다. 1917년 (음) 6월, 채기중과 함께 일본인이 경영하는 직 산금광 습격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노재성(盧在誠)에게 의 뢰한 자금이 조달되지 않아 실행하지는 못했다. 같은 해 8월에는 만주부사령으로 김좌진(金佐鎭)을 파견했 다. 박상진은 1915년 12월, 지휘장 우재룡을 파견해 만주 길 림에 길림광복회를 설치케 했다. 길림광복회는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만주본부였으며, 황해도 의병장 이진룡(李 鎭龍)이 부사령으로 임명되어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이진 룡이 운산금광에서 자금을 모집하던 중 체포되자 김좌진을 만주로 파견했던 것이다. 박상진은 1917년 (음) 6월, 광복회 지도부를 소집해 군자금 모집 방법 변경을 추진했다. 전국의 자산가에게 독립의 당 위성을 설명하고 ‘애국심’에 호소해 자발적으로 제공하는 의 연금을 모집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전국의 광복회원들 이 지역의 자산가를 조사하고, 조사된 자산가들에게 광복회 명의의 통고문을 발송하고 일정한 기간이 지난 뒤에 수령 한 다는 방안을 마련했다. 이에 따라 충청도와 경상도를 중심 으로 전국의 자산가를 조사케 하고 다음과 같은 통고문을 작 성했다. 우리나라 천년의 종사(宗社)는 회진(灰塵)되고 우리 2천 년의 민족은 노예가 되어 섬 오랑캐의 악정폭행은 날로 증 가하니 이를 생각하노라면 피눈물이 솟고 조국을 회복하 고자 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이것이 본회가 성립된 이 유이니, 각 동포는 그 지닌 바 능력을 다해 이것을 돕고 앞 날 본회의 의기(義旗)가 동쪽에 오를 것을 기대하라 박상진은 조사된 자산가 명단과 통고문을 지휘장 우재룡에 게 전달해 그로 하여금 중국 단동, 신의주 등 국·내외에서 발송케 했다. 그러나 광복회의 의연금 모집은 통고문 수령 자들이 일제에 신고함으로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식민지 권력에 안주하려는 이들이 군자금 모집을 외면했기 때문이 다. 따라서 광복회는 민족적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친일 파를 처단하는 의협투쟁(義俠鬪爭) 벌였다. 1917년 5월, 전라도지부에서 서도현(徐道賢)을 처단했고, 1917년 (음) 9월 경상도지부에서 칠곡 부호 장승원(張承遠) 을 처단했다. 충청도지부에서는 1918년 1월 도고면장 박용 하(朴容夏)를 처단했다. 특히 장승원 처단은 광복회가 여러 차례 시도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박상진은 1917년 (음) 8월, 우재룡·권상석(權相錫) 등에게 권총을 주어 두 차례에 걸쳐 장승원 처단을 지시했다. 그러 나 첫 번째는 장승원이 없었고, 두 번째는 소작인들이 모여 있어 실패했다. 박상진은 같은 해 11월 채기중에게 다시 처 단을 명령했고, 채기중은 유창순(庾昌淳)·강순필(姜順必) 등과 함께 거사를 성공시켰다. 채기중은 거사에 성공한 후 장승원 집과 마을 어귀에 ‘나라 를 광복하려 함은 하늘과 사람의 뜻이니 큰 죄를 꾸짖어 우 리 동포에게 경계하노라(曰維光復 天人是符 聲此大罪 戒 我同胞), 경계하는 이 광복회원(聲戒人 光復會員)’이라 기 록한 사형선고문을 붙이고 돌아왔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친일파를 처단했다는 것을 명백히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통고문 발송과 의협투쟁은 일제에게 노출되는 계기 가 되었다. 일제는 1917년 10월경부터 광복회의 존재를 파 악했다. 광복회에서 발송한 통고문이 발견되었고, 광복회의 의협투쟁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광복회원 체포에 수사력을 집중했다. 무단통치가 실 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에서 ‘광복’이라는 명칭을 사용하 는 단체가 조직되어 자금을 모집하고, 의협투쟁을 전개하며 자신들의 정체를 명백히 밝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통고문 수령자의 주소와 의연금 요구액이 자산정도에 비례 3. 군인양성(軍人養成): 우리 대한의 의병, 해산군인 및 남북만주 이주민을 소집하여 훈련하여 채용함 4. 무기구입(武器購入): 중국과 러시아에 의뢰하여 구입함 5. 기관설치(機關設置): 대한, 만주, 북경, 상해 등 요지에 기관을 설치하되 대구에 상덕태(尙德泰)라는 상회에 본회의 본점을 두 고 , 각지에 지점 및 여관, 또는 광무소(鑛務所)를 두어서 이로써 본 광복회의 군사행동의 집회, 왕래(往來) 등 일절(一切)의 연락 기관으로 함. 6. 행형부(行刑部): 우리 광복회는 행형부를 조직하여 일본인 고등 과(高等官)과 우리 한인(韓人)의 반역분자를 수시수처(隨時隨 處)에서 포살을 행함. 7. 무력전(武力戰): 무력이 완비되는 대로 일본인 섬멸전(殲滅戰) 을 단행하여 최후 목적을 완성함 광복회의 투쟁 강령은 ‘무력준비·무관양성·군인양성·무 기구입·무력전’이었다. 투쟁 강령은 독립전쟁을 벌이기 위 한 방략이었고, 대부분이 무력준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 다. 즉 독립군을 양성하고 자금을 조달해 군비를 갖춘 뒤 일 제(日帝)와 일전(一戰)을 벌인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한인(韓人)을 만주로 이주시키고 자금을 조달해 전쟁을 수행한다는 방략을 수립했던 것이다. 따라서 광복회 는 ‘會’ 라는 온건한 명칭을 사용한 반면 편제는 ‘사령관·지 휘장’ 등 군대식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이것은 광복회가 결 성 시점부터 이미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체제로 출발했 다는 것을 말해준다. 〔광복회 조직〕 <본부> 사령관: 박상진(朴尙鎭) 지휘장: 우재룡(禹在龍)·권영만(權寧萬) 재무부장: 최준(崔俊) 사업총괄: 이복우(李福雨) <각도 지부> 경기도지부장: 김선호(金善浩) 황해도지부장: 이해량(李海量) 강원도지부장: 김동호(金東浩) 평안도지부장: 조현균(趙賢均) 함경도지부장: 최봉주(崔鳳周) 경상도지부장: 채기중(蔡基中) 충청도지부장: 김한종(金漢鍾) 전라도지부장: 이병찬(李秉燦) <해외> 단동: 안동여관(손회당(孫晦堂)) 봉천: 삼달양행(정순영(鄭淳榮)) 만주사령관: 이석대(李奭大)·김좌진(金佐鎭) 박상진은 광복회 총사령을 맡아 조직과 활동을 총괄했다. 따 라서 경주 본인의 집이 광복회 본부였다. 대구에 설치한 상 덕태상회도 본부 기능을 분담했다. 박상진은 광복회를 조직 하기 이전부터 상덕태상회를 중심으로 광복회원들을 모집 했고, 광복회를 조직한 후에는 전국의 연락거점을 상덕태상 회에 두었다. 박상진은 전국으로 조직을 확대해 경상도·충청도·전라 도·경기도·함경도·평안도·황해도·강원도지부를 결성했 다. 또한 대구의 상덕태상회와 영주의 대동상점(大同商店) 을 비롯해 대구·영주·삼척·광주·예산·연기·인천 등에 미곡상과 잡화점으로 위한 거점을 설치했으며, 만주에는 안 동여관(安東旅館)·삼달양행(三達洋行)·상원양행(尙元洋 行) 등 활동거점을 설치했다. 5. 군자금 모집과 의협투쟁 박상진은 광복회를 조직한 후 군자금 모집에 주력했다. 광 복회 설립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 기 때문이다. 광복회의 군자금 모집은 다양한 방법으로 추진되었다. 광복 회원 자신들의 재산을 헌납하기도 했으며, 일제의 현금수송 마차를 공격해 자금을 탈취하기도 했다. 일본인 소유의 광 산을 공격하거나 중국지폐를 위조해 정화(正貨)로 바꾸어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광복회는 1916년 총사령 박상진 이 체포되면서 위기를 맞았다. 박상진은 1916년 (음) 6월, 중국 단둥에서 이관구와 조선총 독 처단 계획을 세웠다. 이관구에게 권총 2정을 제공했고, 이관구는 성낙규(成樂奎)· 조선환(曹善煥)에게 각각 권총 1정씩을 제공해 서울로 잠입시켰으나 거사는 성공하지 못 147 광복, 다시 찾은 빛_굳은 의지와 진실한 마음으로 만든 미래 1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