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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광복, 다시 찾은 빛_굳은 의지와 진실한 마음으로 만든 미래 144 | 1913년에는 다시 중국의 상하이와 난징을 방문해 신해혁명 의 지도자 쑨원을 만났다. 쑨원에게 일제의 한국침략과 독 립군 양성을 호소했고, 그로부터 권총을 받고 국내로 돌아 왔다. 박상진은 귀국 후 동지규합에 나섰다. 먼저 경북 풍기의 채 기중(蔡基中)을 만났다. 채기중은 1913년 풍기광복단을 조 직해 만주독립운동기지와 연계해 자금 모집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박상진은 풍기로 채기중을 찾아가 동지로 규합하 고, 독립운동을 함께 하기로 결의했다. 채기중과의 만남은 양제안(梁濟安)의 소개로 이루어졌다. 박상진은 만주 여행 중 양제안을 만났다. 양제안은 허위가 1892년 진보에 머물 때부터 교유하고 있었고, 1896년 김산의진에도 함께 했다. 따라서 허위의 제자인 박상진과 쉽게 동지적 결합을 했고, 풍기광복단의 채기중을 소개했던 것이다. 양제안은 산남의진(山南義陣)에서 함께 활동한 우재룡(禹 在龍)도 소개했다. 우재룡은 풍기광복단과 교류를 하고 있 었으나 독립운동에 참여하지는 않고 있었다. 의병전쟁에 실 패했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상진은 우재룡을 직 접 찾아가 독립에 대한 방략을 설명하고 평생을 함께할 동 지로 규합했다. 이밖에도 황해도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 하던 이관구(李觀求), 진보의진(眞寶義陣) 출신의 권영만 (權寧萬) 등 주로 의병계열의 동지들을 규합해 독립운동을 준비해 나갔다. 박상진은 계몽운동계열의 동지규합에도 주력했다. 박상진 은 대구를 중심으로 윤상태(尹相泰)·서상일(徐相日)·서병 룡(徐丙龍)·이시영(李始榮)·홍주일(洪宙一)·윤창기(尹 昌基)·정운일(鄭雲馹)·신상태(申相泰) 등과 교류를 확대 했고, 이들이 중심이 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回復團) 에 참여했다. 조선국권회복단은 윤상태·이시영·서상일· 홍주일 등이 1913년 (음) 1월 15일 경북 달성군 수성면(현 대구시 수성구 대명동)의 안일암에서 시회(詩會)를 가장해 모임을 갖고 조직한 계몽운동 계열의 비밀단체였다. 조선국 권회복단은 만주와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단체와 연결해 군대양성과 무기구입을 위한 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박상진은 1915년 4월과 6월, 조선국권회복단원인 정운일· 김재열 등과 대구부호 서창규에게 자금모집을 시도했다. 중 국 단동에서 거사에 사용하기 위해 직접 권총까지 구입해 자 금모집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박상진은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국권회복단의 강경파들과 함께 광복회를 결성했다. 4. 통합비밀결사 광복회 조직 박상진은 1915년 (음) 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광복회 를 조직했다. 광복회는 독립군을 양성해 무력이 준비되면 일제와의 전쟁을 벌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목적으로 조직되 었다. 광복회는 풍기광복단·달성친목회(達成親睦會)·조 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回復團)·민단조합(民團組合), 이 관구를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 조직 등 의병전쟁계열과 계몽 운동계열의 국내독립운동단체들이 연합해 결성되었다. 구 성원들은 복벽주의(復辟主義)와 공화주의(共和主義) 이념 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조국의 독립’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참여했다. 이처럼 광복회에 참여한 이들은 이념과 지역이 달랐다. 그러나 박상진은 의병적 성향과 계몽운동적 성향을 모두 겸비하고 있었고, 이들 단체와 인물들을 연합 해 광복회를 결성했다. 광복회원들은 원수 일본을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의무라 여기고 있었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능 력을 발휘해 성심으로 노력하면 강토의 회복과 광복은 당연 히 도래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광복회는 다 음과 같은 투쟁 강령을 수립했다. 1. 무력준비(武力準備): 일반부호의 의연(義損)과 일본인이 불법 징수는 세금을 압수하여 이로써 무장을 준비함. 2. 무관양성(武官養成): 남북만주에 사관학교를 설치하고 인재를 양성하여 사관(士官)으로 채용함 1906년에는 잠시 고향에 내려간 틈을 이용해 의병장 신돌 석(申乭石)과도 의형제를 맺었다고 한다. 박상진의 독립운동 출발은 계몽운동이었다. 그는 1908년 3월 15일 설립되는 교남교육회에 생부 박시규 와 함께 참여했다. 교남교육회는 교육진흥을 목적으로 재경 영남유림들이 조직한 계몽운동단체였으며, 경상도지역에 지회를 설립하고 국권회복을 목표로 영남지역의 근대교육 운동을 추진했다. 박상진의 계몽운동 참여는 양정의숙 출신인 안희제의 영향 도 컸다. 안희제는 1909년 서상일(徐相日)·남형우(南亨祐) 등과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을 조직했다. 대동청년단에는 신민회·교남교육회·달성친목회에 참여한 인물들도 참여하고 있었다. 박상진도 안희제와의 인연으로 이들과의 교류가 이루어졌고, 이후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박상진은 스승 허위의 죽음 을 목격하면서 온건적 국권회복운동인 계몽운동에서 벗어 나 무장투쟁으로 사상과 노선을 정립해 나갔다. 허위는 성 균관 박사·중추원 의관·평리원 수반판사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1905년 일제의 의해 강제로 귀향조치를 당했다. 1904년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후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의 병봉기를 독려했기 때문이다. 허위는 1907년 9월 경기도 연천·적성 등지에서 의병을 모 아 또다시 거병했으며, 이인영(李麟榮)·민긍호(閔肯鎬)·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 등과 13도 창의군을 결성하고 서 울 진공작전을 벌였다. 허위는 동대문 밖 30리 까지 진격했 으나 본대가 도착하기 전 일본군에 패하고 말았다. 허위는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후 임진강·한탄강을 중심으로 항일 전을 벌였으나 1908년 6월 체포되었으며, 같은 해 9월 27일 (양, 10월 21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박상진은 허위가 순국하자 허위의 장례를 혼자서 도맡아 치 렀다. 장례를 치를 가족이 없었기 때문이다. 허위의 큰형 허 훈(許薰), 둘째 형 허신(許藎) 작고했고, 셋째형 허겸(許蒹) 은 만주로 망명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홀로 허위의 시신 을 수습해 김천 지례로 운구해 장례를 치렀던 것이다. 박상진은 허위의 순국을 목격하고 장례를 치르면서 의병전 쟁, 무장투쟁을 통해서만 국권회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 았다. 그의 계몽운동 참여는 방법상의 문제일 뿐 이었고, 허 위가 순국하자 스승의 뜻을 계승해 무장투쟁의 길로 나섰던 것이다. 박상진이 국망 직후 의병봉기를 계획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박상진은 계몽적 성향의 인물이었으나 투쟁방략 에서는 의병전쟁을 계승하고 있었다. 3. 동지규합과 조선국권회복단 참여 박상진은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해 평양지원에 발령까지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고 사임했다.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해 서였다. 박상진은 1910년 경술국치 후 독립운동의 상황과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서 국내·외를 여행했다. 특히 관심 이 많았던 곳은 서간도였다. 서간도지역은 집단적으로 한인 들이 거주지를 형성하고 있었고, 신민회 간부들과 안동유림 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기지가 건설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박상진은 1911년 봄, 서간도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방 문해 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 안동유림들과 만 나 병농제를 실시하고 신흥무관학교 운영 등을 상의했다. 그는 서간도 방문을 통해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했으며, 서간도 독립운동기지를 지원할 계획을 수립했 다. 1911년 말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와 난징을 방문 해 중국의 신해혁명을 목격하고 ‘비밀·폭동·암살·명령’ 등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방략도 수립했다. 박상진은 1912년 귀국해 대구 본정(현재 대구광역시 서문로 1·2로)에 자본금 24만의 상덕태상회를 설립했다. 상덕태상 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한 것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국외로 의 자금 송금과 독립운동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