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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광복, 다시 찾은 빛_굳은 의지와 진실한 마음으로 만든 미래 142 | 박상진 의사의 독립운동 이성우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전임연구교수 1. 가계와 스승 왕산 허위 박상진의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기백(璣伯), 호는 고헌 (固軒)이다. 1884년 음력 12월 7일(양력 1885년 1월 22일) 울산시 북구 송정동(松亭洞, 당시 울산군 농소 송정리)에서 박시규(朴時奎)와 여강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 며, 생후 100일 만에 백부 박시룡(朴時龍)에게 출계(出系) 했다. 그의 가문은 울산의 명문가였다. 조부 박용복(朴容復) 은 1870년 진사시에 급제한 후 북부도사(北部都事)가 되었 으며, 생부 박시규는 1885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해 성균관 전적·사간원 정언·홍문관 시독·장례원 장례를 지 냈으며, 1910년 경술국치 직전에는 정3품 규장각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양부 박시룡도 1890년 별시 문과에 합격해 홍문관 시독·봉 상시 봉사·홍문관 교리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부친이 1887 년 경주 녹동으로 거처를 옮김에 따라 이곳에서 성장했으 며, 14세 되던 1898년 월성 최씨 현교(鉉敎)의 장녀인 영백 (永伯)과 혼인했다. 박상진은 7세 무렵부터 정재학파(定齋學派)의 적통을 계승 한 김도화(金道和)의 문하에서 수학한 사종형 박규진(朴煃 鎭)으로부터 전통 한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박규진이 경 북 진보군 흥구(현, 영양군 청기면 흥구)로 이사한 이후에도 진보와 경주 녹동을 오가며 학문을 연마했으며 한동안 진보 에 머물기도 했다. 그는 진보에서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왕산(旺山) 허위(許 蔿)를 만났다. 왕산 허위는 1854년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 은리 태생으로 한말 의병장이었다. 허위는 일제가 을미사변 을 일으키자 1896년 이기찬(李起燦)·조동호(趙東鎬) 등과 경북 김천에서 김산의진(金山義陳)을 일으켜 충북 진천까 지 북상했으나 고종의 해산명령을 받고 해산했다. 허위는 김산의진이 실패한 후 맏형 허훈(許薰)이 거주하고 있던 진 보에서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하고 있었다. 허위는 진보에 거주하던 박규진과 교유하게 되었고, 박상진은 박규진의 소 개로 허위를 만나 사제(師弟)의 인연을 맺었다. 허위는 1899년 신기선(申箕善)의 추천으로 환구단 참봉에 제수되어 상경했다. 박상진은 스승의 뒤를 따라 1902년 상 경했으며, 그의 문하에서 정치와 병학을 배우면서 혁신유림 (革新儒林)의 길을 걷게 되었다. 혁신유림이란 유교윤리를 고수하면서도 근대국가와 민족적 자주의식을 소유한 유림 을 말한다. 허위는 관직생활을 시작하면서 신학문을 통해 개화사상을 수용했고, 개화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허위의 이러한 사상은 박상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박상진도 전통 유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 계몽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그 의 이러한 사상적 전환은 노비해방으로 이어졌다. 박상진은 1904년 잠시 고향으로 내려와 노비를 해방하고 적 서차별을 없애는 혁신을 단행했다. 노비제도는 1894년 갑 오개혁 때 폐지되었으나 관습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따라 서 이상룡(李相龍)·김좌진(金佐鎭)·이회영(李會榮)·여운 형(呂運亨)·류인식(柳寅植)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은 자신 들이 독립운동을 시작하면서 노비들을 해방시켰다. 민족운 동은 봉건적 신분해방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 이었다. 박상진도 다르지 않았다. 일제로부터 국권이 침탈 되고 구속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도 노비들을 구속하고 있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2. 신학문의 수용과 계몽운동 박상진은 1905년 2월 개교한 양정의숙에 입학했다. 신학문 과 신사상의 수용을 권유했던 허위의 권고에 따른 것이다. 양정의숙은 법률과 경제를 중심으로 교육했던 3년제 전문 학교였다. 박상진은 양정의숙에 재학하며 신학문을 받아들 이고, 미래의 동지들을 만났다.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를 만났으며, 홍성출신으로 상경해 있던 김좌진(金佐鎭)을 만나 의형제를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