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page

79 광복, 다시 찾은 빛_굳은 의지와 진실한 마음으로 만든 미래 78 | 3·1운동 각 도별 장소, 횟수 및 사상자 현황(1919.3.1.~4.30)에 의하면 3, 4월 두 달 동안 일어난 시위의 61.7%에 해당하는 731회 시위가 일어났고, 그 가운데 302회가 폭력투쟁이었다. 이와 같이 운동이 전국적으로 지속해서 가열된 것은 광범위한 민중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투쟁을 이끌어갔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농민·노동자 등 민중들이 점차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3·1운동은 우리나라 민족운동사에서 거대한 분수령을 이루는 전국적인 항일투쟁이었다. 이것은 개항 이래 전개되었던 두 흐름인, 개화파운동-독립협회-계몽운동과 민란-농민전쟁 -의병전쟁-독립전쟁 이라는 두 계열의 운동이 근대 공화주의와 민족자결주의 원칙 아래 하나가 되어 민족적 항일투쟁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동대문을 메운 만세시위 군중들의 모습 출처_ 한국민족문화대백과 3·1운동의 최초의 준비는 ‘민족대표’ 로 불리는 천도교·기독교·불교 등 종교계 지도급 인사 들과 이들과 연결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 운동을 논의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제창과 이에 호응하는 상해·미주(美州)·동경 등지의 독립운동 소식이었다. 한편 운동의 초기 준비단계에서 시위 및 대중동원계획은 주로 학생들의 비밀조직망 활동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초 서울의 학생층은 ‘민족대표’ 들과 상관없이 1월부터 회합을 거듭하면서 독자적인 대중 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2월 하순 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이 학생대표 김원벽(金元璧)· 강기덕(康基德) 등과 회합하여 천도교·기독교 합작에 의한 민족운동이 추진 중임을 알리고 이와 연합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학생층에 의해 선언서의 배포, 군중동원, 시위주도계획이 이루어졌다. 3·1운동은 서울을 비롯한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지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계속해서 기독교·천도교 관계 ‘민족대표’ 대부분의 출신지역인 평안도·함경도·황해도의 주요도시로 확대되었다. 3월 상순에는 경기도·평안도·함경도·황해도의 도시를 중심으로 기독교·천도교의 조직력이 강한 지역에서 시위가 주로 전개되었다. 이는 초기에 ‘33인’ 의 종교적·인적 관계에 의해 독립 선언서 등이 배포되면서 사전 준비 작업이 진행된 결과였다. 3월 중순 이후에는 운동이 중·남부지방 일대로 확대되어 전국적 규모로 확산되었다. 도시 뿐 만 아니라 농촌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상화하였다. 또한 지방사회의 지식인층만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중소상공업자 등 다양한 계층의 대규모 군중이 광범위하게 봉기하였고, 그 시위 횟수도 증가 하였다. 운동의 형태도 독립선언식이나 만세시위에서 더 나아가 점차 폭력적으로 되어 갔다. 특히 3월 하순에서 4월 상순까지의 시기는 동시 다발적이고 격렬한 투쟁이 지속되어, 운동은 최고조에 달했다. 3·1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