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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광복, 다시 찾은 빛_굳은 의지와 진실한 마음으로 만든 미래 128 | 김광진과 아들 김영소 1940년(55세), 춘해보건대학교 제공 협성학교 재학 당시 사진 1910년대, 춘해보건대학교 제공 2열오른쪽두번째인물이김광진이다. 그는 저술에 몰두하여 주자학·양명학·병법·의학·대종교·한글음성학·외국어 등 다양한 영역을 폭넓게 다루면서 매우 많은 저서를 남겼다. 일제 강점기 유교 지식인으로서 전근대의 유교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면서도 창조적으로 계승 하였다. 그리고 이를 근대사회의 과제(국가와 민족, 개인과 자유, 지식과 과학, 이익과 욕망, 의학과 신체), 그리고 민족의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로 연결 하여, 전근대와 근현대 사이의 지적 단절이 두드러진 일제 강점기 속에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가교(다리)로서 역할을 하였다. 호는 해악(海岳),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도락촌(지금의 백락동)에서 출생했으며, 비안 지역의 향반 가문에서 자라난 그는 어려서부터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다. 1910년 대구의 협성학교(協成學校, 지금의 경북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신학문을 익혔다. 이 당시에 대종교(大倧敎)나 독립운동, 나아가 박은식의 양명학 등에 대한 정보나 지식을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 1912년 협성고등학교를 졸업 하고, 청도의 공암학교(孔岩學校), 대구의 명신학교(明信學校), 월배학교 (月背學校)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14년 서울로 가서 대종교당(大倧敎堂)에 입당하여, 전국 순회 전도 강연을 하기도 했으며 1915년에는 조선국권회복단의 교육부장으로 활동 했다. 1919년 조선국권회복단 활동, 3・1만세운동, 임시정부와 내통 등의 이유로 일본 경찰에 의해 구금되었는데, 그날 밤 탈출해 문경을 거쳐 언양 궁근정리에, 그의 제자 정인락(鄭寅洛)이 사는 정회조(鄭檜朝)의 집에서 3개월간 숨어 지냈다. 그 후 독립운동에 참여하고자 다시 중국 만주로 망명을 떠났다. 그는 봉천 에서 약 9개월 간 머물렀는데 병이 나서 그해 가을 안동(현재 중국 단동시) 에서 요양을 했다. 1921년 고향인 비안으로 귀국한 김광진은 대구의 독립 운동가 윤상태(尹相泰)가 설립한 월배학교에서 3년 동안 교장을 지냈다. 1924년 의생(醫生) 시험에 합격하여 대구 산격동(山格洞)에 한의원을 개업하였다. 1927년 9월에는 신간회 대구지부가 결성되자 여기에 참여했고, 1930년 12월 14일에 신간회 대구지부 지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산되고 일제의 압박이 심해진 이후 한의원을 운영하는 가운데 저술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이 동안에도 세브란스의학 전문학교에 다니는 그의 둘째 아들 김영소(金永韶, 춘해병원 설립자)를 통해 여운형·이극로·안희제 등에게 밀서를 전달하였다. 김광진 1938년, 춘해보건대학교 제공 김광진 金光鎭, 1885~1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