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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광복, 다시 찾은 빛_굳은 의지와 진실한 마음으로 만든 미래 122 | 그의 대표작인 「광야」, 「절정」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제강점기 치하의 민족적 비운을 소재로 삼아 강렬한 저항 의지와 민족정신을 표현한 것이 특징 이다. 1941년 폐병을 앓아 성모병원에 입원해 잠시 요양하고, 1943년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국내 무기반입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그의 어머니와 맏형의 장례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했다. 그 해 늦가을에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어 수감 중 1944년 그의 나이 40세에 북경감옥에서 순국하였다. 1946년 이원조(이육사의 동생, 비평가)에 의해 유고시집인 『육사시집』이 출간되었다. 이육사의 어머니 허길 1934년 6월 20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할 당시 신원카드 사진 이육사의 생가 육우당 경상북도 안동시 태화동 소재 1904년 4월 4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원록 (李源錄)으로 어릴 때는 원삼(源三)으로 불렸다. 활동 당시에는 이활 (李活), 대구 이육사(大邱 李六四), 육사(肉史), 육사(陸史) 등으로 기고하는 등 다양한 이름을 썼다. 아버지 이가호는 퇴계 이황의 13대손이며, 어머니 허길은 의병장 범산 허형의 딸이다. 허형은 박상진의 스승이었던 황산 허위의 종형제(사촌) 지간이다. 1920년 대구로 이사한 후 영천의 백학학원에서 배우면서 교사로 활동 하기도 했다. 1925년 의열단에 가입하고 일본으로 유학한 이후 1926년 일시 귀국하고 중국 북경으로 가서 북경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27년 가을에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좌로 3년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이 때 그의 수인(囚人) 번호가 264번 이어서 호를 육사(陸史)로 정했다고 전한다. 1929년에 출옥한 후, 1930년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서 북경대학 사학과에 수학하면서 만주와 중국 여러 곳을 다녔다. 이 때, 정의부(正義府)·군정부 (軍政府)·의열단(義烈團) 등 여러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해 독립투쟁을 벌였다. 1933년 9월에 귀국하여 이때부터 시 창작에 전념하고 육사란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그의 첫 작품은 1935년 『신조선』에 발표한 「황혼」이었다. 1934년 신조선사 근무를 비롯해 중외일보사, 조광사, 인문사 등 언론기관에 종사하면서 시 외에도 한시와 시조, 논문, 평론, 번역, 시나리오 등에 재능을 보였다. 1935년 시조 「춘추삼제(春秋三題)」 와 시 「실제(失題)」 를 썼고, 1937년 『자오선』 에 「청포도」, 「교목」,「파초」 등을 발표하였다. 그의 시 발표는 주로 『조광』, 『풍림』, 『문장』, 『인문평론』 등을 통해 1941년까지 계속되었으나, 시 창작활동 못지않게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전 생애를 통해 17회나 투옥되었다. 이육사 1943년 중국 북경으로 가기 전 이육사의 마지막 사진 이육사 李陸史, 1904~19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