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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광복, 다시 찾은 빛_굳은 의지와 진실한 마음으로 만든 미래 120 |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다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에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쁜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개벽(開闢)』 70호, 1926년 6월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필명은 상화(尙火)·무량(無量)·상화(想華)·백아(白啞). 대구광역시 중구 서문로 2가 출신. 7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큰아버지와 어머니의 가르 침을 받으며 자랐다. 백부 이일우(李一雨)는 소작인을 함부로 하지 않는 지역사회의 명망있는 지주였다. 우현서루를 창건하여 각지의 인물을 모아 연구하게 하고, 달서 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성 개화에 앞장섰으며, 상당한 재산을 독립운동자금 으로 지원하였다. 이러한 가풍의 영향으로 이상화 역시 일제에 대한 강렬한 저항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3·1운동 때 대구학생 시위운동을 주도하는 등 독립운동과 문예운동 등에 투신하였다. 21세에는 현진건(玄鎭健)의 소개로 박종화(朴鍾和)를 만나 홍사용(洪思 容)·나도향(羅稻香)·박영희(朴英熙) 등과 함께 ‘백조(白潮)’ 동인이 되어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또한, 김기진(金基鎭) 등과 1925년 파스큘라(Paskyula)라는 문학연구단체 조직에 가담하였으며, 그 해 8월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27년에는 의열단(義烈團) 이종암(李鍾巖)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기도 하였다. 1937년 중국 장개석 국민정부의 장군인 형 이상정(李相定)을 만나러 갔다 와서 일본관헌에게 구금되었다가 11월 말경에 석방되었다. 그 뒤 3년간 대구 교남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그의 나의 40살에 학교를 그만 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다가 43살에 위암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말세의 희탄(欷嘆)」(1922)·「단조(單調)」(1922)· 「나의 침실로」(1923)·「몽환병(夢幻病」(1925) 등이 있으며, 특히 일제에 대한 저항 시 계열의 작품으로는 「조소(嘲笑)」(1925)·「선구자의 노래」 (1925)·「통곡(慟哭)」(1926)·「저므는 놀안에서」(1928) 등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또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사회참여적인 저항적 색조 를 띤 원숙한 작품으로 동인지 『개벽』이 폐간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상화는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는 시인으로, 사회개혁과 일제에 대한 저항을 담은 계몽주의와 혁명사상을 노래하였다. 그의 시비는 대구 달성 공원에 세워졌다. 이상화 이상화 李相和, 1901~1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