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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광복, 다시 찾은 빛_굳은 의지와 진실한 마음으로 만든 미래 114 | 서덕출 사진 세로 11.5 가로 8, 근현대, 서대진 기증 봄편지 노래비 1968년, 울산광역시 중구 학성공원 내 봄편지에 나오는 제비 형태로 만들어 세웠다. 울산광역시 중구 교동 출신으로 이름은 ‘덕출(德出)’ 로 불리었는데, 호적 에는 ‘덕줄(德茁)’ 로 되어 있고, 족보에는 ‘정출(正出)’ 로 올려져 있으며, 예명은 신월(晨月)이다. 서덕출의 아버지는 서형식(徐炯植)으로 『시대일보』의 기자를 지내고 청년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1912년 그의 가족은 울산 교동 큰집에서 학산동 으로 분가했는데, 그 무렵 서덕출은 대청에서 놀다가 미끄러져 왼쪽 다리를 다쳤다. 이 때 염증이 척추에 번지는 바람에 등이 굽고 평생 걸을 수 없는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그의 나이 여섯 살이었다. 이에 그의 아버지는 울산 중구 복산동에 새로 집을 지어 이주했다. 서덕출은 신체장애로 정규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어머니가 한글을 가르 쳤고, 아버지는 공부할 책과 문예지를 주문해서 그에게 읽게 했다. 그러한 부모의 보살핌과 뒷바라지 속에서 각종 문학서적을 탐독했고, 한글·일어· 산수·약학·에스페란토어 등 다양한 학문을 익혔다. 또한 그는 손재주가 뛰어나 자수와 뜨개질도 즐겨했다고 하는데, 그의 유품 가운데 강에서 빨래 하는 여인, 곧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자수 작품이 남아 있어 이를 짐작할 수 있다. 19살이 되던 해인 1925년 5월, 소파 방정환이 주도한 아동잡지 『어린이』 ‘독자란’에 「봄편지」가 입선하였다. 동시 「봄편지」 입선으로 윤석중이 주도하던 어린이 독서회 ‘기쁨사’의 동인이 되었다. 또한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현실에서도 조선의 봄을 노래한 그의 동시 「봄편지」는 그해 10월 10일 ‘색동회’ 주관의 열린동요회에서 김영복의 독창으로 불려지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서덕출은 『어린이』 를 비롯해 『신소년』, 『새벗』, 『아동문예』, 『학생』, 『아이생활』 등의 여러 잡지와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외일보』, 『중앙일보』 등의 신문에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감시를 받게 되어 많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서덕출 서덕출 동요집에 수록된 ‘봄편지’ 서덕출 徐德出, 1906~1940 1934년 11월 전필남(全必南)과 결혼하여 슬하에 양자(良子)와 대진 (大振)남매를 두었다. 가장으로서 가계를 꾸리기 위해 1935년 약제사 시험에 합격해 ‘애생당(愛生堂)’ 이라는 신약방을 차렸지만, 1938년 가을 무렵부터 척추병이 악화되어 1940년 34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울산에서는 그를 기리기 위해 1968년 학성공원에 ‘봄편지 노래비’ 를 세웠고, 서덕출 문학제·문학상·창작 동요제 등을 개최하고 있다. 서덕출 노래비 건립 관련 신문기사 서대진 기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