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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광복, 다시 찾은 빛_굳은 의지와 진실한 마음으로 만든 미래 100 | 그의 학문과 유지는 한글학회 중심의 학자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그의 사상을 기리는 모임인 외솔 회가 1970년에 창립되어 기관지 『나라사랑』 을 발간하며, 해마다 국학연구와 국어운동에 뛰어난 사람 들에게 외솔상을 시상함으로써 그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의 고향인 울산광역시 중 구에 ‘외솔기념관’ 을 건립해 한글사랑과 나라사랑에 대한 정신을 기리고 있다. 한편, 평소 최현배는 병영의거에 참여했던 동생 최현구*를 매우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외솔 최현배 생가 전경 울산광역시 중구 병영 12길 15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39호 외솔기념관 전경 2010년 3월 26일 개관 호는 외솔, 울산광역시 중구 병영 출신으로 고향의 일신학교(현 병영초등 학교), 한성고등학교, 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를 거쳐 1925년 4월 일본 경도제국대학을 졸업하였다. 1926년 4월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1938년 9월 흥업구락부사건으로 파면당할 때까지 재직하였다. 1941년 5월 연희전문 학교에 도서관 직원으로 복직하였으나, 그해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사임하고 1945년 광복까지 4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9월부터 1948년 9월까지, 1951년 1월부터 1954년 1월까지 문교부 편수국장에 두 차례 재직하면서 교과서를 만들었다. 1954년 연희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문과대학 학장과 부총장을 역임하고 1961년 정년퇴임으로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1964년 3월부터 2년간 부산 동아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1949년 한글학회 이사장에 취임하여 20년간 학회를 이끌었고, 1949년 한글전용촉진회 위원장, 1954년 학술원 회원에 뽑혔고 이어 임명회원· 부회장을 맡았다. 1957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부회장·대표이사 등으로 국어운동의 중심적인 인물로 활동하였다. 여러 방면에 걸친 활동과 공로로 1955년 제1회 학술원공로상, 1967년 5·16 민족상 학예부문 본상을 수상하였고, 1970년 3월에 사망하자 국민 훈장 무궁화장에 추서되었다. 대표 저서로 『우리말본』(1937년 완간), 『한글갈』(1942년), 『글자의 혁명』 (1947년), 『우리말 존중의 근본뜻』(1953), 『한글 가로글씨 독본』(1968년) 외에도, 애국·애족의 사상이 담긴 『조선민족 갱생(更生)의 도(道)』(1930년), 『나라 사랑의 길』(1958년) 등이 있다. 외솔 최현배 *최현구 (崔鉉玖, 1898 ~ 1940, p 89) 울산 하상면 서리 출생. 최현배의 동생. 4월 5일 병영 의거 당시, 일신학교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주재소로 행진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대구감옥 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최현배 崔鉉培, 1894~1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