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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국토를 강점하고 있던 일본제국주의자들은 1941년 12월 8일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일으킨 세계대전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의 청장년을 징병과 강제노동으로 여성은 정신대로 무수히 끌어가고 학생 노력 동원과 식량(쌀)은 물론 각종 유기류(祭器)마저 무자비하게 모조리 강제 징발하던 시절인 1944년 선생은 춘천농업학교 2학년생으로 나이 고작 16세였지만 항일운동에 남달랐던 우리 양양의 애국자의 후손답게 암암리에 동료학생들에게 전시체제에 반항할 것을 종용하던 중 당시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본왕과 조선총독 등 수뇌들에게 조선에서 청장년의 강제동원과 식량 등 물자 강제 공출과 학생의 강제 노력 동원의 중지 등 10개 항의 일제통치반대 항의문을 정정당당히 발송하여 일본관헌을 크게 당황시켰다. 이로인하여 일경에 검거되어 경찰과 학교 당국에서 20여일간에 걸쳐 혹독한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자 정신병자로 위장시켜 춘천도립병원에 강제 입원시키고 독살할 음모까지 계획하고 있던 중 8.15해방을 맞아 11개월만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는 36년간의 항일운동사에 있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애국운동으로 더욱이 16세의 학생으로서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독특한 투쟁으로 평가된다. 이에 우리는 양양의 혼이 담긴 거룩한 그 뜻을 기리 후세에 전하여 양양골의 빛이 되게 하여 동해 멀리 일본을 바라보며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재정립해 가자는 뜻에서 이선생님의 외침을 기리고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