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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191년 신의주에서 암약 중 일경에 피집되었으나 탈옥 도주하고 이래 불승으로 가장 은신터다. 1919년 3월 1시 환향하여 독립선언과 군중 시위를 주도하시다가 도강 망명하여 대한독립단 조병준대의 부단장이 되시었다. 동년 5월 중국인 거상 진복성으로부터 대금을 차용하여 상해로 선발하였는데 임시정부 기관지 발행의 필요를 절감하고 상해독립신문 간행에 투신하시었다. 1921년 7월 불령 안남으로 파견되어 임시대표단장으로 활동하시다가 1923년 1월 소환되어 안동교통국에 밀파되시니 이는 임정의 국내연락을 담당하였던 영인 상선회사 이륭양행의 기능을 부활케 하심이었다. 여기서 또한 독립신문의 국내 보급을 꾀하시더니 동년 5월에 미행 일경에 피체되어 5년 언도를 받고 신의주 원산 함흥의 각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시다가 1926년 가출옥하시었다. 익 27년에는 이상재 등과 제휴하여 민립대학 기성에 힘썼으나 여의치 못하여 만주 길림성과 동몽고 등지로 재 망명 활동을 하시다가 1945년 8.15 광복으로 환국하시니 이때부터 본 군에 정착하시어 독립신문의 속간과 한국대학의 설립운영과 독립협회의 재건을 위하여 심혈을 쏟으시더니 만년에는 UN기념협회를 창립하여 오로지 국태민안만을 추구하사 세인이 그를 최호 선생이라고 통칭하였다. 1958년 1월 30일 서거하시니 선생의 거룩한 애국충절을 영세에 기리기 위하여 이 비에 그 건국공적을 추려 새긴다. 1981년 6월 논산군수 양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