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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 - 자식들에게조차 말하지 못한 비밀이 밝혀진 것은 1994년 이육사의 항일운 동 을 추적하던 대구MBC의 한 다큐멘터리 제작팀에 의해서였다. 이육사가 북경 의 감옥에서 순국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정확히 어디에 수 감돼 있었고 또 무슨 죄목으로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인지에 대한 조사는 전혀 이 루어지지 않고 있었고, 이육사의 북경 감옥 순국사실은 거짓이라는 주장 까지 제기되었다. 이러한 주장이 나오게 된 이유는 이육사가 투옥되었다는 기 록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호적부에는 그가 ‘이병희’라는 친척의 집에서 사 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는 점 때문이었는데, ‘이병희’라는 인물이 나 서지 않는 한 이육사의 옥사 주장은 이 새로운 주장에 의해 대체될 지경에 이 르렀 다. 1994년 당시 “광야에서 부르리라-이육사”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 하고 있던 대구MBC제작진은 이병희가 살아 있을 가능성에 주목하여 탐문을 거 듭한 끝에 그동안 남자일 것이라고 짐작돼 오던 이병희라는 인물이 여성이며, 아직 생존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병희의 실체가 드러남에 따라 이육사와 관련된 풀리지 않았던 수수께 끼들 이 일거에 풀렸다. 당시 이육사는 북경과 중경, 연안의 인맥들을 엮는 좌 우합 작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서울에서 체포된 뒤 북경으로 압송돼 와 북경 주재 일본총영사관 지하 감옥에서 심문을 받던 중에 1944년 순국을 했다는 구 체적 인 사실이 밝혀졌던 것이다. 또한 그의 최후를 지켜 본 이병희 역시 이육 사와 정치적 선택을 함께 했던 동지였으며, 함께 투옥돼 옥고를 치렀다는 사실 까지 추가로 밝혀졌다. 1994년 8월 8일에 다큐멘터리가 방영된 이후에도 새로운 사실들은 속속 드 러났다. 이병희의 입을 통해 그의 부친인 이경식 선생이 이육사 형제와 더불 어 장진홍 의거에 연루돼 투옥된 바 있으며, 그 자신 역시 1930년대에 노 동쟁 의를 주도하던 노동운동가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이러한 주장이 각종 문 헌을 통해 사실로 확인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러한 새로운 사실을 바탕 으로 하여 이병희는 1996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정부로부터 독립운동을 인정받아 건 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는데, 이병희의 업적이 밝혀지면서 중국에서 독 립운 동을 하다 광복을 앞두고 숨진 부친 이경식 선생의 공로 또한 인정이 되 었고, 이에 이병희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 중국까지 가 부친의 유해를 수습해 왔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