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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3 - 5월 경성에 있는 ‘종연방적(鍾淵紡績)’에 위장취업해 500여 명의 근로 자를 모아 파업을 주도했다. 항일운동 주도 혐의로 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서대 문형 무소에 잡혀 갔고 4년 반 동안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면서 모진 고문을 당했 다. 그 뒤 1940년 북경으로 건너가 의열단에 가입했고 단원으로서 동지 박시 목·박봉필 등에게 문서를 전달하는 연락책을 맡아 활동했다. 1943년 국 내에 서 북경으로 건너온 이육사와 독립운동을 협의하다 그해 9월에 잡혀 북경 형무 소에 구금되었다. 총살형을 선고받기도 했으나 이육사가 자신과 결혼할 사람 이라고 주장하며 석방을 요구했고 결국 1944년 1월 11일, 이병희만 먼저 가석 방되었는데 그 닷새 후인 1월 16일 이육사는 옥중에서 순국하고 만다. 결국 이육사의 유품과 사체 수습은 동거인으로 되어있었던 이병희가 맡았다. “그날 형무소 간수로부터 육사가 죽었다고 연락이 왔어. 저녁 5시가 돼 달려 갔더니 코에서 거품과 피가 나오는 거야. 아무래도 고문으로 죽은 것 같아.” 이병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고 한다. 자신이 출옥할 때만 해도 멀쩡 하 던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털어놨다. 그는 이육사의 시신을 화 장해 가족에게 넘겨 줄 때까지 유골 단지를 품에 안고 다녔다. 혹시 일 제가 훼손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해서 심지어는 맞선을 보러 가는 날도 육사의 유 골을 품에 안고 나갔다고. ‘광야’, ‘청포도’ 같은 이육사의 주옥같은 시는 이병희가 없었더라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병희는 지난 50여 년간 자신의 독립운동을 숨기고 살아야 했다. 이른바 ‘사회주의계열 여성 독립운동가’로 낙인찍힌 까닭인데 그러한 이유 로 이병희, 그리고 그녀의 친정 조카인 이효정 역시, 후손들에게 불이익이 갈 까봐 조국 광복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도 하나뿐인 아들에게 조차 그 사 실을 말하지 못한채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고 한다. 오히려 안기부의 비밀 문서 철에 는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로서 ‘불순분자의 한 사람’으로 남아 있었 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 신문에는 그녀가 사회주의 노동운동 조직의 일원 으로 체포되었다는 기사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