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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 - 실업동맹회’로 명칭을 바꾸고 조직 목적을 실업 발전과 동포간의 친목증진 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는 것으로 발전시켰다. 그녀는 ‘영남부인실업동맹회장’ 을 역임하면서 15년간 한인사회여성 발전과 독립운동 후원, 재미한인사회의 구 제 사업 활동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특히 1930년대 후반부터는 독립금과 각종 의 연금, 군자금을 제공하는 한편, 1940년대 초반에는 ‘부인구제회 호놀룰루지 방 회’ 대표로서 ‘부인구제회’ 승전후원금 모집이원, 부인구제회 사료원 등 으 로 활동했고 ‘대한인국민회’의 회원으로 수십 차례에 걸쳐 총 수백여 원 의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였다. 고국의 광복을 위해 아낌없는 지원과 희생을 했지만, 뒷날 광복을 맞고서 도 이들부부는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도쿄 주재 한국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했 지 만, 반 이승만 노선을 걸었다는 이유로 번번이 좌절되었고 끝내 허가받지 못 했 다. 그러던 중 1947년 이희경이 교통사고로 죽고, 1950년 권도인도 교통사고 로 중상을 입고 고생하다가 1962년 세상을 떠났다. 2002년, 정부는 이 부부의 독립운동에 대한 공훈을 기리어 건국포장을 추 서 했으며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을 제안했다. 한국에 자주 성묘를 올 수 없는 자 녀들은 망설였지만 조국에 대한 부모의 간절한 염원을 아는 터라 결국 온 가 족 의 합의로 2004년에 대전현충원으로 부모를 이장했다. 그리고 2012년 10월 초 에는 막내딸 에스터 여사가 완성된 묘역과 묘소, 그리고 비석을 보기 위해 서 84세의 나이를 무릅쓰고 내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