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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 - □ 지아비의 길을 따라 의부義婦의 길을 간 권성 권성權姓(1868-1920)은 1868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닭실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안동권씨 권양하 權養夏이고, 어머니는 풍산김씨 김중태金重泰의 딸이다. 권성은 어린시절 소남小男으로 불렸다. 뒷날 제적등본에 권씨 부인이라는 뜻을 가 진 ‘권성’으로 적혀, 권성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권성은 어려서 부터 기교를 부리거나 모가 나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항상 행동과 언어를 조심 하여 삼가고 또 삼가는 사람이었다. 17세가 되던 1885년 결혼을 하였다. 남편은 네 살 아래인 이명우李命羽 (1872-1920)였다. 그녀의 시댁은 안동시 예안면 부포리이다. 권성은 결혼 뒤 시부 모님 모시기를 극진하게 하였다. 아울러 제사 모시는 일과 손님맞이에도 공경과 정성을 다하였다. 1894년에는 남편 이명우가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진사 가 되는 경사가 있었다. 진사시에 합격한 뒤 부부가 문중 잔치에 초대된 적이 있 었는데, 거기에서 그녀는 줄곧 법도 있고, 조용한 자세를 보였다. 이에 참석한 사 람들이 모두 권성을 칭송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나라는 바람 앞에 등불 같았다. 그 이듬해 명성황 후가 시 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졌다. 이를 애통하게 여기며 세월을 보내던 이명우 는 1905 년 을사늑약이 있자 문을 닫고 칩거에 들어갔다. 1910년 끝내 나라가 망 했다는 소식과 함께 이만도를 비롯한 척사유림의 자결순국 소식이 들려왔다. 그 는 근심 과 분노로 말미암아 건강까지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이를 안타깝게 여 긴 권성 은 “상황上皇은 아직 무탈하시고, 양친이 살아계시는데 병에 시달려서야 될 일 입니까”라며 그를 만류하였다. 이명우는 아내의 말처럼 아직 광무황제가 살아있 고, 부모님도 계시니 때를 기다리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1912년 봄, 권성은 가족과 함께 속리산 아래 충북 보은군 마로면 갈평리 葛坪里 로 이사하였다. 남편은 죄인된 몸으로 세속을 버리고, 자정自靖하겠다는 뜻으로 고향을 떠난 것이다. 나라가 무너졌는데 의리를 지키지 못했으니, 죄스러운 마음 이 너무 컸다. 옮겨간 지 3년 만인 1915년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3년 상을 마친 뒤, 가족은 시아버지가 남긴 유언에 따라 계룡산 아래 봉서리凰棲里(현 대전 광역시 유성구 송정동)로 다시 옮겨갔다. 1918년 11월 5일(음 10. 2) 시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그리고 두 달 보름 지난 1919년 1월 21일(음 1918. 12. 20), 광무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