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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 -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4~5년의 행적이었지만 남성중심 사회에 그 녀가 던 진 메아리는 컸다. 그녀는 갔지만 보수의 중심, 안동에서도 여성운동가들 이 나왔 다. 그들은 신간회 안동지회 ․ 안동청년동맹 ․ 안동콤그룹 등에서 활약하였다. 이효정李孝貞(1913∼2010)은 노동운동으로 일제에 저항했던 여성이다. 1933년 조직된 사회주의운동단체 ‘경성 트로이카’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이효정은 1913년 봉화 춘양의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조상들은 대대로 안동시 예안면 부포 리에 살다가 조부 때에 서울로 갔다. 증조부 이규락, 종조부 이동하와 이경식, 숙 부 이병기, 고모 이병희 등이 모두 독립운동을 하였다. 2009년 3․1절 기념 다큐멘 터리에서 왜 독립운동을 했냐는 질문에 “어릴 때부터 그런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에 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해야 한다고 배웠 고, 또 그렇게 했다.”는 그녀의 말에서 집안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그녀는 18세 때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시절 꿈은 문학가였 다. 그러나 시대는 그 꿈을 허락하지 않았다. 2학년 때인 1929년, 광주에서 일어 난 학생항일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녀도 만세를 불러 경찰서에 잡혀갔다. 이듬해는 친구들과 백지동맹투쟁을 벌였다. 시험지를 백지로 낸 시험거부 투쟁이 었다. 이효정은 이 일로 무기정학을 당하고 말았다. 그 뒤 1933년 9월 종연방적 경성제사공장 여성직공파업을 주도하였다. 당시 여직공들은 장시간 노동에 비해 임금이 적었다. 이들의 권익을 위해 투쟁하던 이효정은 또 다시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초를 겪었다. 그 뒤에도 노동운동을 이어가다 1935년 11월 결국 검거되어, 약 13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출옥 뒤 이효정은 결혼을 하고, 아내와 어머니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9년 뒤 그토록 원하던 해방이 찾아왔다. 그러나 6․25전쟁과 남편의 월북은 또 다른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늘 감시와 취조를 받아야 했 다. 그러다보니 늘 그늘로 숨어들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행복했던 일은 여고 시절의 꿈이었던 시집을 낸 것이었다. 바로 회상(1989년)과 여든을 살면서 (1995년)라는 시집이다. 2006년에 와서 그녀의 항일투쟁이 새롭게 평가되면서 독립유공자로 포 상을 받 게 되었다. 이 때 이효정은 “동지들은 다 가고 없는데 나 혼자서 이걸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