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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 - 에 아버지 허발을 따라 가족들과 함께 만주 영안현으로 망명하였다. 16세 가 되던 1922년, 허은은 석주 이상룡의 손자 이병화와 결혼하였다. 이상룡의 가족이 된 그 녀는 만주지역 항일지사의 그림자가 되어 온갖 고난을 견뎌냈다. 각종 회 의가 집 에서 이루어지다보니 하루하루 땟거리를 마련하는 일도 녹록치 않았다. 시집 온 이듬해는 쉴 수가 없어 부뚜막에서 쓰러지기도 하였다. 이런 여건 속에서 도 항일 투사들을 뒷바라지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다. 그녀는 조국의 운명이 자신의 운명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녀의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 리가(1995)에는 그 매서웠던 삶의 현장이 그대로 녹아있다. 1932년 5월 이상룡이 끝내 만주 땅에서 순국하자, 허은은 시조모・시어 머니와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망명도 힘들었지만 돌아오는 길은 더 어려웠다. 일 제경찰 의 감시를 피해 밤에 이동해야 했고, 거기다 습종(濕腫)에 걸린 시조모는 손자에 게 업혀 와야 했다. 1932년 만주에서 돌아와 조상대대로 물려 내려온 임청각을 처음 대면한 허은은 만감이 교차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일제의 감시가 심해 월곡면 도곡으로 옮겨갔다. 그녀는 여전히 궁핍한데다 힘들었다. 귀국 후 1년이 채 되지 않은 1933년 4월 시조모 김우락은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리 고 11년 뒤인 1944년 시어머니 이중숙도 중풍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 뒤 그리 원하던 광복이 되었지만 해방정국의 상황은 그녀에게 또 다른 충격 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남편을 잃고 말았다. 43세의 그 녀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래도 오랜 세월을 견뎌냈던 그녀에게 1990년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시조 부 이상룡의 유해가 중국에서 봉환되었고, 남편 이병화도 독립장에 추서된 것이 다. 그리고 1995년 88세가 된 그녀는 만주생활을 담은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 소리가」를 출판했다. 허은은 이 책 말미에 “이제 좋은 시절 만나 여한이 없다. 비록 고달픈 발자국이었지만 큰일하신 어른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부끄러울 뿐이라”고 썼다. 임청각 독립운동가 3대 뒤에는 종부 3대가 있다. 그녀들은 만주에서 민족의 자 존심을 지켜냈고, 독립운동가를 지키며 길러냈다. 그것이 곧 나라를 지키는 길이 라 여겼다. 그녀들은 “희생의 진정한 가치”를 돌아보게 한다. 오늘을 사는 우리 는 어떠한 작은 희생도 버거운 무게가 되었다. 사실은 그 누군가의 희생위에 살 아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