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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 - 많이 정착하였다. 취원창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곳은 송화강이 가까워 물고기가 많기로 유명하였고, 토지가 비옥하여 어미지향魚米之鄕이라고 하 였다. 1946년 교포들의 대이주로 지금은 한인들이 살고 있지 않다. (위치 : 흑룡강성 아성시 거원진(巨源鎭)) □ 만주지역 항일투사의 버팀목이 된 임청각 종부 김우락·허은 1910년 나라를 잃자, 경북의 수많은 유림들은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들의 목표 는 오직 하나 독립전쟁을 통해 조국을 되찾는 것이었다. 그 망명 대열에 는 여인 들도 많았다. 그녀들은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며, 조국광복의 꽃이 되었다 . 그 대 표적인 예가 석주 이상룡과 함께 만주에서 모진 고초를 겪었던 임청각 종 부 김우 락과 그의 손부 허은이다. 김우락(金宇洛)(1854~1933)은 1854년 아버지 김진린과 어머니 함양박씨의 4남 3 녀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다. 큰 오빠는 김대락이며, 막내 여동생이 김락이다. 출 생지는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내앞마을)이다. 그녀는 성장하여 석주 이상룡의 부 인이 되었다. 1875년 9월 아들 이준형이 태어났고, 이때 그녀는 만 21살이었다. 이를 통해 그녀의 결혼시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김우락은 1911년 57세의 나이로 남편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녀의 만주 생활은 고난과 슬픔의 연속이었다. 어린 손녀와 손자를 잃었고, 1915년에는 오빠 김대락도 생을 마감하였다. 어려움의 연속이었지만 그녀는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자신을 다잡았다. 그러다가 1922년 그녀는 손부 허은(許銀)(1907~1997)을 맞아, 그 무거운 짐을 조금 덜어냈다. 허은은 구미시 임은동에서 태어났다.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왕산 허위가 그의 재종조부이며, 이육사의 어머니 허길이 바로 그녀의 종고모이다. 그녀는 8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