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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 - ▲박순부·이해동의 시댁 김동삼 생가 1914년 백서농장(白西農庄) 장주, 1919년 서로군정서 참모장을 맡아 독립군단을 이끌었다. 이는1920년 청산리대첩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 뒤 간도참변으로 무너진 동포사회 와 독립군단 재건에 온 힘을 쏟았 다. 1923년에는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어 회를 이끌었 다. 그 뒤 정의부와 민족유일당운동촉성회를 이끌며,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 에 온 힘을 쏟았다. 북만주에서 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1931년 10월 하얼빈에서 일제경 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그는 1937년 끝내 옥중에 서 순국하였다. (위치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1리 278) ▲이해동의 생가 터 전경 이해동의 생가 만화공晩花公 댁이 있던 곳, 1910 년 10월 향산 이만도가 바로 이 집에서 단식 순 국하였다. 옛 집은 없어지고 지금은 <향산 이만도 선생 순국유허비>가 있다. (위치 :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인계리 736-1) ▲ 박순부·이해동 유적 및 탐방지 약도 박순부와 이해동이 1930년대 중반부터 1945년까지 살던 곳이다. 북만주의 여러 곳으로 흩어져 고생하던 가족들 은 1933년 취원창으로 이주하였다. 이해동은 만삭의 몸 이라 1934년 초봄에야 이곳으로 옮겨왔다. 당시 이곳은 300호가 넘는 큰 동네였고, 거주 동포들은 대부분 고향 이 경상도였다. 의성김씨 일족도 10여 호가있었다. 간도참변 이후 서간도와 중부 이남출신 한인농민들이 북만주 지역으로 이주하여, 하얼빈 부근의 농촌지역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