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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 - 박순부 이해동의 시댁 일송 김동삼(金東三, 1878~1937) 생가이다. 집의 외형 은 많이 바뀌었으나 일부 구조가 남아있다. 김동삼은 1907년부터 협동학교와 신민회, 대동청년단에서 애국계몽운동 을 펼 쳤다. 이어 나라가 무너지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기지건설에 앞장 섰다. 세월이 흘러 16세가 되던 1920년 이해동의 혼사 이야기가 오고갔다. 마침 내 김 동삼의 아들 김정묵(金定黙)으로 혼처가 정해졌다. 김동삼은 아버지 이원일의 스 승이자, 투철한 동지였다. 그런데 그해 시삼촌이 될 김동만(金東滿)이 일제에게 무 참하게 학살되는 참극이 일어났다. 이로 말미암아 위협을 느낀 양가는 북만주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1921년 북만주로의 이동이 급작스럽게 추진되면서 결혼식도 급하게 진행되었다. 이름이 결혼식이지 그저 머리를 올리고 비녀를 꽂았을 뿐이 었다. 양가 일행은 길을 나서, 친정 가족은 여하(呂河)라는 중국인 마을에 터를 잡 고, 이해동은 영안현 주가툰에 정착했다. 그 뒤 이해동의 가족들은 북만주를 떠돌며 힘겨운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녀는 생활전선에서 사투를 벌였고, 때로는 마적들과도 맞서야 했다. 그런데 1931년 충 격적인 소식이 날아들었다. 만주일대에서 항일투쟁을 이어가던 시아버지와 친정 아버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녀는 하얼빈주재 일본총영사관으로 면회를 갔고, 이는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그런데 시어머니 박순부는 이때도 함께 면회를 가지 않았다. 그것이 남편과 나라를 위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광복 뒤에도 중국에 남게 된 이해동은 온갖 고초를 겪다가 1989년이 되어서야 고국으로 돌아왔다. 여섯 살에 고국을 떠나 85세가 되어서야 돌아온 것이다. 꼬박 77년이 걸렸다. 그녀는 그 고단했던 여정을 만주생활 77년으로 엮었다. 여기에 시어머니 박순부에 대한 회고가 담겨있다. 이 글은 우리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 지를 보여준다.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이 그대로!! “평생 불평 한마디 없이 말없이 참고, 침묵으로 살아온 시어머님의 일생은 훌 륭하다고 생각한다. 시아버님께서 직업혁명가로 평생을 국권 회복을 위하여 공을 세웠다면 그 속에는 시어머님 몫도 있다고 생각한다.” 【박순부 ․ 이해동 유적 및 탐방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