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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 - ▲시어머니 박순부여사와 며느리 이해동여사 □ 만주벌 호랑이 일송의 버팀목이 된 박순부, 이해동 1931년 하얼빈에서 한 여인이 남편과 이 별하였다. 바로 일송 김동삼의 아내 박순부 (朴順夫)(1882-1950)이다. 그녀는 반남박씨 박제희(朴濟禧)의 딸로 태어나 김동삼의 부 인이 되었다. 1911년 남편이 만주로 망명하 자 그녀도 아들 형제를 데리고 그 길을 따 랐다. 만주에서 그녀는 남들처럼 따뜻한 가 정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다. 20년 동안 그녀가 남편을 만난 것은 단 두 번뿐이었 다. 1931년에 체포된 남편이 감옥에 갇혔을 때도 면회를 가지 않았다. 그것이 남 편과 조국을 위하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결국 박순부는 끝내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 국내 감옥으로 옮겨졌던 남편이 1937년 옥중에서 순국했기 때문이다. 그 녀 또한 1950년 이국 땅 중국에서 눈을 감았다. 그녀와 함께 만주에서 온갖 풍상을 이겨낸 며느리 이해동(李海東)(1905~2003)은 1905년 안동의 예안에서 태어났다. 예안면 인계리에 위치한 그녀의 집, 만화공댁 은 바로 김락의 시아버지 이만도( 李晩燾)가 단식순절한 곳이다. 조부 이강호는 이 만도가 순국하자 장례를 치른 뒤, 아들 이원일(李源一)을 앞세워 가족 모두 만주 로 망명하였다. 그 망명 대열에 여섯 살의 이해동이 있었다. 이해동은 조부와 조 모, 아버지와 어머니, 숙부 이원행과 숙모, 고모 두 분과 함께 만주로 향했다. 영 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와 싸우는 것으로 첫 고생이 시작되었다. 훗날 이해동 은 회고록에서 “할머니께서는 고놈의 날씨 왜놈보다 더 독하다고 하셨다.”고 기록하였다. 고향에서 가져온 재산이 별로 없었던 이해동의 집안은 생활고에 시달렸다. 동 포들은 첫 농사의 흉작으로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였고, 풍토병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해동 일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20대의 청년이었던 숙부가 목숨 을 잃었고, 이어 1년 뒤 10대 소녀였던 두 고모도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여건 속 에서도 아버지 이원일은 경학사 조직에 참여하여, 간도지역 독립운동 기반조성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