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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 - 白下舊廬 김락이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던 이 집 은 큰 오빠 백하 白下 김대락金大洛이 1885년 무렵 건립하였다. 지금도 당시 축대와 초석 일부가 사랑채 앞에 남아 있다. 사랑채에 걸려있는 현액 ‘백하구 려’는 김대락이 순국한 뒤 금상기琴相 基가 쓴 것이다. 김대락은 1909년 이 집을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 교사로 제공하고, 애국계몽 운동에 앞장섰다. 이어 나라가 무너지자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기 지 건설을 이끌다 1914년 작고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뜻은 여동생인 김락, 집안 조카 김만식·김정식·김규식, 종손자 김성로의 항일투쟁으로 계승되었다. 나라 에서는 이들의 우뚝한 공적을 기려 2008년 백하구려를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위치 :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257) ▲고등경찰요사 이때 그녀의 나이 58세였다. 그런데 고통은 여 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2년 뒤인 1921년 2차 독립 청원운동을 준비하던 남편 이중업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어 둘째 아들 이종흠도 1926년 독립운 동 자금 모집활동을 펼치다 체포되어 1년의 옥고 를 치렀다. 홀로 남아 고통스러운 만년을 보내던 그녀는 두 번의 자결을 시도했다고 전한다. 그 뒤 김락은 1929년 2월 67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3대에 걸쳐 독립운동을 펼쳤던 한 가문의 가운 데서 김락은 한 아내, 한 어머니에 머물지 않고, 민족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녀가 보여주었던 ‘의 로운 길’은 식민지의 아들 이동흠의 ‘이정표’ 가 되었다. 이것이 김락열사가 오늘 우리에게 주 는 가슴 뜨거운 교훈이다. 【김락 유적 및 탐방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