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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 김락은 만18세에 이르러 도산면 토계리(하계마을) 이중업李中業(1863-1921) 과 혼인하였다. 시아버지는 양산군수를 지냈던 향산 이만도李晩燾였다. 김락 은 결혼한 지 4년 만에 첫 딸을 낳고, 보통의 여인들처럼 시어머니의 가르침 아래 집안을 꾸려 나갔다. 어쩌면 그녀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한 때였을 것 이다. 그런데 2년 뒤 김락은 시어머니를 여의고 말았다. 시집온 지 6년 만에 그녀에게 무거운 짐이 쏟아졌다. 김락은 시어른을 모시며, 일곱 살 된 어린 시동생과 자녀들을 보살펴야 했다. 그로부터 3년 뒤 1889년 첫아들 이동흠李 東欽이 태어났다. 무거워진 그녀의 삶에 또 다른 과제가 더해졌다. 바로 나라의 운명이었 다. 1910년 나라가 무너지자 시아버지 이만도는 단식으로 순절하였다. 관직 에 있 던 사람으로 나라를 지키지 못한 책임과 부끄러움에 스스로를 단죄한 것이다. 이듬해는 오빠 김대락과 형부 이상룡이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해 만주로 떠났 다. 시아버지의 죽음! 만주로 떠나는 언니와 오빠들! 이들의 행보는 김 락에게 도 일생의 큰 교훈이자 과제가 되었다. 국내에 남아있는 가족들도 그 뜻을 이었다. 20대 후반에 접어든 맏아 들 이 동흠李棟欽은 1917년 무렵 광복회에 들어가 독립운동자금 모집 활동을 펼쳤 다. 광복회는 1915년 박상진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비밀결사단체이다. 그런데 1918년 그 활동이 드러나면서 이동흠도 체포되어 5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그 뒤 1919년 남편도 독립운동에 나섰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에서 강 화회의가 열리자, 여기에다 ‘독립청원서’를 보내는 파리장서의거를 펼쳤다. 시아버지의 죽음은 이렇게 온 가족에게 ‘조국광복’이라는 과제를 남겼다. 김락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안으로는 시아버지의 뜻을 새기며, 밖으로는 아내와 어머니의 자리를 지켜야 했던 그녀도 1919년 3월 독립만세에 직접 뛰 어들었다. 이 사실을 알려주는 유일한 자료가 바로 고등경찰요사이다. 이 책은 1934년 경북경찰부가 만든 고등계 형사들의 지침서였다. 여기에 “안동 의 양반 이중업의 처는 1919년 소요당시 수비대에 끌려가 취조를 받다가 실 명失明하였고, 이후 11년 동안 고생한 끝에 1929년 2월에 사망했다.”라는 기 록이 있다. 김락은 안동의 예안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 다. 그로 말미암아 그녀는 고문으로 두 눈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