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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 그런데 이들이 일제의 손에 넘어가면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대 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계가 구명운동에 나섰다. 이때 남자현은 이들 을 옥바 라지하며 이 사건을 여러 곳에 알리는 등 뛰어난 활약상을 보였다. 이러 한 노력 으로 독립운동가들은 무사히 풀려나게 되었다. 이 무렵 남자현의 활동은 큰 변화를 보였다. 교육활동에서 의열투쟁으 로 전환 한 것이다. 의열투쟁이란 일제의 주요 기관이나 인물을 직접 공격하는 투 쟁방법 이다. 이는 불특정 다수를 공격하는 테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 녀는 사 이토총독 암살 기획, 김동삼 구출 활동(1931년) 등을 펼쳤다. 1932년 들어 만주의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1932년 3월 1일 만주가 완 전히 일 제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만주침략을 비난하는 국제여론 이 일어 났다. 이에 국제연맹은 그 현장을 조사하기 위해 대표단을 파견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남자현은 우리민족의 독립의지를 담은 혈서를 써서 전달하기로 하였 다. 그 녀는 국제연맹조사단장 릿튼이 방문하는 1932년 9월 19일을 그 날짜로 잡 고 왼쪽 무명지 두 마디를 잘랐다. 그리고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란 다섯 글자를 썼 다. 독립을 원하는 우리 민족의 뜻을 붉은 피로 쓴 것이다. 끝내 혈서는 전달되지 않았지만 남자현이 보여준 기개와 용기는 남성들도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어 1933년 만주국 주재 일본전권대사 처단 계획을 세우고 폭탄을 준비하였 다. 그러나 계획이 드러나면서 체포되고 말았다. 60세의 남자현은 하얼빈 주재 일 본영사관 감옥에서 6개월 동안 가혹한 고문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차라리 죽음으 로 항거하자는 결단을 내리고 단식투쟁을 시작하였다. 그녀는 음식을 끊은 지 9 일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감옥을 나온 남자현은 한 여관에서 마지막을 맞았 다.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도 조국광복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바로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진다.”였다. 남자현은 전통적인 규범 속에서 성장한 ‘구여성’이었다. 그러나 46세의 나이 에 그 껍질을 깨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 뒤 14년 동안 만주에서 조국광복에 헌 신하였다. 그녀는 독립군의 어머니이자 열혈투쟁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