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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 들이 50명을 넘는다. 이 마을로 시집온 사람도 있고, 딸들도 있다. 이 들 이 모두 독립운동에 기여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그렇다고 관계가 없 다 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김동삼의 며느리 이해동이 시어머니 박 순 부에 대해 회상한 말을 보면 여성들이 만주 망명과 독립운동에서 무엇 을 위해 어떻게 살았는지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어머님은 혁명가의 부인으로서 손색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30세 의 나이로 고향에서 남편과 갈라진 시어머님은 아들 형제를 데리고 만 주에 와서도 남들처럼 남편과 함께 따뜻한 가정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 다. 정말 과부나 다름없이 청춘을 살어 오셨던 것이다. 하얼빈 영사관에 서 체포되어 가족이 명회를 가는데 시모친은 남편을 만나러 가지도 않 았다. 이렇게 남편을 위하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것이라는 시어머님 생 각은 구식 여성으로서는 거룩하다고 생각한다. 평생 남편에 대해 불 평 한 마디 없었고, 말없이 참고 침묵으로 살아온 시어머님의 일생은 훌륭 하다고 생각된다. 시아버님께서 직업혁명가로 평생을 국권회복을 위하여 공을 세웠다면 그 속에는 시어머님 몫도 있다고 생각한다(이해동 회고록 만주생활 77년) 남편이 사망하자 따라 자결한 여성도 나왔다. 예안 출신 배재형이 황무 지를 개척하는 일에 몰두하다가 1919년 사망하였다. 이에 그의 아내가 18일 동안 단식한 끝에 남편 뒤를 따라 자결하였다. 그러자 한족회 는 1919년 6월 총재 이탁李沰의 이름으로 포열장褒烈狀을 드려 추모하였 다. 거기에는 “목숨을 버려 의를 취하고 효열을 다한 것이니 역사의 사표 가 될 만하다”고 적었다. 7) 독립운동가 부친과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아이들을 길러야 했다. 그것도 정상적인 수입이 있는 것이 아니고, 경험도 없는 농사에 매달리지만 흉 년 을 거듭 당하는 어려운 나날이었다. 그런 속에 결혼하고 아이 낳고, 어 른 모시고 병수발을 들고, 생활비를 마련해야 하는 고난의 나날들이었다. 더 구나 마적과 중국 군인들의 노략질에 목숨을 보전하는 것만으로도 고마 워 할 따름일 정도였다. 그러니 어느 순간도 무슨 행복이니 그런 말은 머 릿 속에 그려볼 틈도 없었다. 8) 허은의 회고를 보자. 7) 김희곤, 『안동사람들이 만주에서 펼친 항일투쟁』, 지식산업사, 2011, 23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