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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 다. 김노숙은 여성 혁명투사로서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하는, 흔하지 않 은 기록을 남겼다. 만주에서는 그의 이름이 드높이 알려지지만, 정작 고향 에 서는 아는 이가 드문 것이다. (2) 여성 해방운동에 앞서 나간 정칠성 정칠성丁七星(丁錦竹)은 1897년 대구에서 가난한 집에 태어나 일곱 살 어린 나이에 기생학교에 들어가 성장했다. 그러다가 18세 될 무렵부터 사 회운동에 눈을 떠, 1922년 도쿄영어강습소를 다니고 귀국한 뒤 여성운 동· 사회운동에 발을 내디뎠다. 1924년 대구여자청년회를 비롯하여 조선여 성 동우회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이 되면서 그러한 걸음은 본격화 되었다. 이 듬해에 경북 사회운동 단체인 사합동맹四合同盟을 조직하고, 도쿄여자 기 예학교에 유학하고서는 유학생들의 사회운동 단체인 삼월회에 참가하 였 다. 1926년 1월 《조선일보》에 실린 「신여성이란 무엇」이란 그의 글 에서, 그는 신여성이 모든 불합리한 환경을 부인하는 강렬한 계급의식 을 가진 무산여성이라고 주장했다. 1927년 2월 좌우합작 단체인 신간회가 결성되자, 여성 자매단체인 근 우회 발기에 참가하고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그로부터 1931년 신간 회 가 해소될 때까지 신간회와 근우회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정칠성은 여성문제와 민족차별 문제를 날카롭게 이해하고 사회주의 적 비판정신으로 해결 방안을 찾은 인물이다. 한편으로는 여성의 교육문 제, 부녀자와 아동의 노동문제 등을 사회복지 차원에서 해석하고, 다른 한 편 으로는 민족차별 문제를 극복해야 하는 당위성을 지목하였다. 그는 이 러 한 두 가지 과제를 계급투쟁 이론을 접목시켜 해결하려고 노력한 것이 다. 그는 1947년 월북하였다. 3. 내앞마을 사례로 본 독립운동에 몸 바친 이름 없는 여성들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친 내앞마을 사람이 정확하게 몇 명인 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추적하노라면 일단 그곳으로 망명하여 활동 하 거나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은 대개 150명에서 200명 사이로 추정된 다. 그 가운데 확인되는 인물만 헤아려도 140명을 넘는다. 이 가운데 부녀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