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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 래 마을은 안동댐에 수몰됨)에서 빈농으로 태어났고, 두 살 때 아버지 를 여의었다. 사월동이면 광산김씨 집안 출신일 수 있고, 노魯 항렬이라 짐 작되지만 족보에서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1912년, 만 여섯 살 되던 해 에 어머니가 시어머니와 아들 김노흠金魯欽(1897년생), 그리고 딸 김노숙 을 데리고 만주로 갔다. 이상룡이나 김동삼과 같은 안동출신 지도자들이 터 를 닦은 유하현 삼원포에 도착한 그는 열일곱 되던 1923년 삼원포의 동 명중학을 졸업한 이우백과 결혼하였다. 김노숙의 항일투쟁 역정은 1924년부터 시작되었다. 그해 11월 한진 ㆍ 김강 등이 반석현 호란진에서 남만청년동맹을 조직하자, 여기에 동참하 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남만청년동맹이 문을 연 야학에서 한자와 한 글 을 배웠다. 그런데 불행이 닥쳤다. 결혼한 지 6년, 그의 나이 만 23세 되 던 1929년에 남편 이우백이 투쟁을 벌이다가 희생된 것이다. 김노숙은 자신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1931년 반석현 반동구위원 회 서기인 이동광과 결혼하였다. 23세에 남편을 잃은 그녀가 택한 길은 단 순 한 재혼이 아니라, 무장투쟁의 길이요, 그 길에 동지를 반려자로 새로 맞 아들인 것이다. 1932년 그는 부녀대婦女隊를 조직하여 직접 전투에 나 서 기 시작하였다. 이 부녀대는 남만주 항일투쟁사에서 유일한 부녀무장조 직 으로 나타난다. 1933년 5월 7일 남편 이동광이 중국공산당 반석중심현 위 원회 서기라는 책임을 맡게 되자, 김노숙은 이동광의 조수가 되어 활동 하 였다. 항일 혁명의 일선에서 대개 부부가 서기와 비서를 맡는 일은 허 다 했다. 그해 6월 중국공산당 반석현위원회 확대회의를 열고 있을 때, 마 침 ‘토벌대’가 공격해 왔다. 그러자 김노숙은 10여 명의 적위대원으로 지 대 를 편성하여 토벌대를 치고 빠지면서 다른 곳으로 유인하여, 끝내 회 의 참석자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였다. 1933년 11월 초 양정우ㆍ이홍광이 이끄는 동북인민혁명군 독립사, 앞 에서 말한 한호가 제3단장을 맡은 바로 그 부대가 반석현 일대에서 전 투 를 벌일 때, 그도 무장공작대 30여 명을 이끌고 참가하였다. 그가 맡 은 임무는 홍군 부상자와 환자를 호송하는 것인데, 일본군ㆍ위만군과 전투 를 벌이면서 밀림 속 산굴에 있는 야전병원으로 그들을 옮겨야 했다. 그 런 임무를 시원스레 해냄에 따라, 김노숙의 명성도 높아졌다. 1936년 10월 그녀는 집안현 대청구 일대에서 물자구입 사업을 벌였 다. 그러다가 일본수비대 200여 명의 기습을 받아 전투를 치르다가 전사하 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