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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 놓고 대기중이던 일본군 80연대와 대치하게 되어 부득이 행진을 정지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일본군·헌병·경찰은 시위대열로 뛰어들어 닥치 는 대로 시위 군중을 구타하며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현장에서 많은 시 위군중이 체포되었는데, 그녀도 함께 체포되었으며, 이해 4월 18일 대 구 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 렀 다. 4) 국내항일 사회운동에 나선 여성 유인경은 대구 사람이다. 1919년 비밀결사 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 가 입 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1919년 3∼4월 오현 주 吳玄洲·오현관吳玄觀·이정숙李貞淑 등이 주도·조직한 혈성단애국부인회 와 최숙자崔淑子·김원경金元慶·김희열金熙烈·김희옥金熙玉 등이 중심이 된 대 조선독립애국부인회가 같은 해 6월 대한민국청년외교단 총무 이병철李 秉 澈의 주선으로 통합하여 결성되었다. 이후 동회는 기독교회·학교·병원 등 을 이용해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면서 회원들의 회비와 수예품 판매 를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수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그 는 거창·밀양·통영을 통괄하는 대구지부장으로 선임되어 조직확대에 힘쓰 는 한편 동년 8월 군자금 백원을 본부에 교부하는 등의 활동을 폈다. 동회 는 1919년 9월 김마리아金瑪利亞·황애시덕黃愛施德을 중심으로 결사부·적 십 자부를 신설하고 항일독립전쟁에 대비한 체제로 조직을 전환하였다. 동 회 는 대한민국청년외교단과 함께 임시정부 국내 연통부聯通府의 역할을 대 행하였으며 본부와 지부를 통해 대한적십자회 대한총지부의 활동을 수 행 하였다. 또한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힘써 6천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송 금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을 펴던 중 그를 비롯한 동지들은 1919년 11 월 일경에 피체되었고, 그는 1920년 12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 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5) 한국광복군에 참가한 여성 김봉식은 1940년 2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에 입대 하 여 항일투쟁 활동을 전개하던 중 1941년 1월 1일 한국광복군이 창군 되 자 중국 서안西安에 본부를 둔 광복군 제5지대에 편입되어 지대장 나 월 환羅月煥 아래에서 활동하였다. 그후 1942년 5월 제5지대가 광복군 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