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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 는 점에서 높이 평가를 받을 만하다. 다음으로 신금분申分今은 영덕군 지품면 원전동 시장에서 윤악이尹岳 伊 와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신분금은 남편이 독립운동을 계획하 다 검거된 후 같은 처지인 윤악이와 함께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였 다. 1919년 3월 24일 장날 원전동 시장에서 윤악이가 앞장서 “우리는 여 자 인데도 한국독립을 희망하고 한국의 만세를 부르짖는다”고 연설하자 신 분 금은 이에 호응하여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신분금은 체포되어 1919 년 4월 16일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윤악이는 경북 영덕군 지품면 원전동 시장에서 신분금申分今과 함께 독 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윤악이는 남편이 독립운동을 계획하다 검거 된 후 같은 처지인 신분금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1919 년 3월 24일 장날 원전동 시장에서 윤악이가 앞장서 “우리는 여자인데도 한 국독립을 희망하고 한국의 만세를 부르짖는다”라고 연설하자 신분금도 이 에 호응하여 만세시위를 펼쳤다. 윤악이는 체포되어 1919년 4월 16일 대 구지방법원 영덕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 를 치렀다. 임봉선은 경상북도 칠곡 사람이다. 1919년 3월 8일의 대구 서문밖 시 장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곳은 2월 24일 경 상 도 독립만세운동의 연락책임자였던 이갑성이 대구에 내려와, 제일교회 에 서 기독교계의 유지 이만집李萬集·이상백李相柏·백남채白南埰 등과 만 나 국내외의 정세를 설명하고, 3월 2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 용 상李容祥을 통하여 독립선언서 2백장을 전달하면서부터 독립만세운동 이 계획되었다. 당시 신명여학교 여교사인 그녀는 이 계획에 찬성하였는 데, 마침 자기를 찾아온 김무생金武生·박제원朴齊元으로부터 서울과 평양에 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 때의 여성의 활약상을 전해듣고, 이에 적극 참여 하 기로 결심하였다. 한편 계성중학교·대구고보·성경학교 학생들과도 연락 을 취하여 3월 8일의 서문외 장날을 이용하여 연합시위를 전개하기로 결 의 하였다. 3월 8일 오후 3시경, 그녀는 50여명의 신명여학교 학생들을 인 솔하고 시장에 나아가, 1천여의 시위군중과 합세하여 시가지를 행진하 였 다. 그러나 그녀가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서 앞의 제지선을 뚫고 중앙파 출 소를 돌아 달성군청 앞의 삼각지에 이르렀을 때, 6대의 기관총을 설치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