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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락金宇洛, (1854~1933)은 1854년 안동시 임하면 내앞마을에서 태어났다. 큰 오빠는 김대락이며, 막내 여동생이 김락이다. 석주 이상룡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1911년 57세의 나이로 남편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였는데 온갖 어려움을 감내하며 남편과 함께 만주항일투쟁의 주춧돌을 놓았다. 1932년 5월 이상룡이 만주 땅에서 순국하자, 가족들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는데 귀국 후 1년이 채 되지 않은 1933년 4월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허 은 許 銀 , ( 1 9 0 7 ~ 1 9 9 7 ) 은 구 미 시 임 은 동 에 서 태 어 났 는 데 의 병 장 으 로 활 약 하 다 순 국 한 왕 산 허 위 가 그 의 재종조부이며, 이육사의 어머니 허길이 바로 그녀의 종고모이다. 여덟살에 가족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여 1922년에 석주 이상룡과 김우락의 손자인 이병화와 혼인했다. 각종 회의가 집에서 이루어지다보니 하루하루 땟거리를 마련하는 일도 녹록치 않았지만 그녀는 만주지역 항일지사들을 뒷바라지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그림자가 되어 온갖 고난을 견뎌냈다. 1932년 석주 이상룡이 끝내 만주땅에서 순국하자 험난한 길을 넘어 귀국했다. 1945년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이했으나 그 기쁨도 오래가진 못했는데 한국전쟁으로 남편을 잃게 된 것이었다. 허은은 남편과 아들 4형제를 먼저 보내고 오랜 세월을 홀로 견디며 살았다. 어느덧 여든이 넘은 1990년에야 시조부 이상룡의 유해가 중국에서 봉환되었고, 남편 이병화가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만년인 1995년에는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의 바람소리가』라는 회고록을 남겨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 투쟁기의 생활사(生活史)를 증언 하였다. 허은은 이 책 말미에 “이제 좋은 시절 만나 여한이 없다. 비록 고달픈 발자국이었지만 큰일하신 어른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부끄러울 뿐이라”고 썼다. 김우락·허은의 시가, 임청각 왕산·허위 생가터 허은의 시가 임청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이 태어난 집이다. 또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그의 동생 이상동·이봉희, 아들 이준형, 손자 이병화, 조카 이형국·이운형·이광민 등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들이 모두 이곳에서 태어났다. 2009년 5월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위치 : 경북 안동시 법흥동 20) 한말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 에서 순국한 왕산 허위의 생가터로, 허은의 재종조 부이다. (위치 : 경북 구미시 임은동 266 왕산기념공원) 만주지역 항일투사의 버팀목이 된 임청각 종부 “김우락” · “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