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page

박순부朴順夫, (1882~1950)는 일송 김동삼의 아내로 1911년 남편이 만주로 망명할 때 그 길을 따랐다. 1931년 김동삼이 감옥에 갇힌 후에도 남편과 조국을 위하는 일이라 여기고 면회 한번 가지 않았다. 1937년 옥중에서 김동삼은 순국했고, 그녀 또한 1950년 이국 땅에서 눈을 감았다. 며느리인 이해동은 『만주생활 77년』에서 시어머니의 기여를 이렇게 말했다. “평생 남편에 대해 불평 한마디 없었고, 말없이 참고 침묵으로 살아온 시어머님의 일생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시아버님께서 직업혁명가로 평생을 국권 회복을 위하여 공을 세웠다면 그 속에는 시어머님 몫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해 동 李 海 東 , ( 1 9 0 4 ~ 2 0 0 3 ) 은 안 동 예안에서 독립운동가 이원일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생가인 만화공댁에서 김락의 시아버지인 이만도가 단식으로 순절하자 조부 이강호는 아들 이원일을 앞세워 가족 모두를 데리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때 이해동의 나이가 여섯 살이었는데 고향에서 가져온 재산이 별로 없었던 이해동의 가 족 들 은 생 활 고 에 시 달 렸 다 . 1 6 세 가 되 던 1 9 2 0 년 김동삼의 아들인 김정묵과 혼담이 오고가던 중 간도지역의 한인들이 일제에 의해 학살당하는 참극이 발생했다. 시삼촌이 될 김동만도 무참하게 학살당하고 말았는데, 이에 양가는 급히 결혼식을 올리고 북만주로 이주하게 되었다. 북만주에서도 이해동과 가족들은 생활전선에서 사투를 벌이고 때로는 마적떼와 맞서면서 힘겨운 생활을 이어나갔다. 광복 뒤에도 중국에 남게 된 이해동은 온갖 고초를 겪다가 1989년이 되어서야 고국으로 돌아왔는데 그 세월이 꼬박 77년이나 걸렸다. 그 고단했던 여정을 『만주생활 77년』으로 엮었다. 박순부와 이해동의 시가,김동삼 생가 이해동 생가터 박순부와 이해동의 시가 일송 김동삼의 생가이다. 집 의 외형은 많이 바뀌었으나 일부 구조가 남아있다. 김 동삼은 1907년부터 협동학교와 신민회, 대동청년단에 서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는데 나라가 무너지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기지건설에 앞장섰다. 1931년 10월 하얼빈에서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경성형무소에서 옥 고를 치르던 그는 1937년 끝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위치 :경북 안동시 임하면 천전1리 278) 이해동의 생가 만화공(晩花公)댁이 있던 곳이다. 1910 년 10월 향산 이만도가 바로 이 집에서 단식 순국하였 다. 옛 집은 없어지고 지금은 <향산 이만도 선생 순국 유허비>가 있다. (위치 : 경북 안동시 예안면 인계리 736-1) 만주벌 호랑이 일송 김동삼의 버팀목이 된 아내 “박순부”와 며느리 “이해동”